젊은 들소처럼 밭을 갈다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2.07.02 11:06수정 2002.07.1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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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기를 기다려 미뤄뒀던 밭일을 시작했습니다.
며칠 비가 오고 하루 개인 날, 굳었던 땅의 살 풀리는 소릴 들었습니다.
그것은 땅이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봄에 시작한 일을 가물다는 핑계로 중단했다 시작하려니 다시 온갖 핑계가 발목을 잡아 머뭇거리고 있던 참이었지요.
나는 땅의 소리에 응답해 내친 걸음에 집터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또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일단 시작하자 막막하기만하던 일이 놀라운 속도로 진척되어갑니다.
눈이 게으를 뿐만 아니라 생각 또한 게으름을 알겠습니다.


오늘도 삽과 괭이, 주먹밥과 오얏 몇 개, 물 한 병을 챙겨들고 집터까지 왔습니다.
촉촉해진 흙은 손길 닫는 만큼 부드러워집니다.
하지만 폐허가 된 빈 집터를 개간하여 밭을 만드는 일이 결코 녹록한 일은 아닙니다.

파내도 파내도 돌은 끝없이 나오고, 오래 묵은 풀뿌리들은 나무뿌리만큼이나 캐내기 사납습니다.
산밭을 일구는 일이 이와 다르지 않을 테지요.

모자를 써서 얼굴은 가렸지만 햇볕에 그대로 노출된 어깨와 목덜미는 뻘겋게 익어 화끈거립니다.
괭이질할 때마다 쏟아지는 땀은 오히려 빗줄기처럼 시원합니다.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빠질 듯하여 잠시 그늘에서 쉽니다.
나는 부러 오래 앉아 있기 불편한 자리를 골라 앉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 편안히 쉬고도 싶지만, 자리가 편하면 안주하기도 쉽지요.
여름날, 가야할 길은 멀고 나는 오래 쉬어 갈 수 없습니다.
다시 괭이자루를 손에 쥡니다.

지금 일구고 있는 이 땅은 내가 나고 자란 어린 날의 집터입니다.
할아버지가 노년에 고향을 등지실 때 평생을 일구던 땅들을 팔았습니다.
수천 평의 밭을 다 팔았지만 그 돈으로는 농사 지으면서 걸머진 농협 빚 하나 온전히 갚을 수 없었지요.


할아버지는 이 집터마저 내 놓으시려고 했습니다.
그때 어린 내가 말렸지요.
나중에 내가 다시 내려와 살 테니 제발 이 집만은 팔지 마시라고.
결국 할아버지는 손자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한 뙈기의 땅이나마 남겨질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지만, 당시에는 내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지요.
할아버진들 손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셨겠습니까.
돌아오마는 손자의 말이 기특하셨을 뿐이겠지요.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는 저승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다시 이승의 고향으로 돌아와 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폐허가 된 이 집터에도 언젠가는 꼭 집을 지어야겠다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후, 그렇게 몇 해를 흘려보냈지요.

세연정 부근에 이미 집을 지어 살고 있는 나는 그것이 부질없는 욕심임을 알았습니다.
땅에 대한 사랑은 아름답지만 땅에 대한 집착은 사람과 땅의 관계 또한 황폐화시키는 행위임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던 지난 봄 어느 날, 문득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땅에서 무슨 큰 이익을 얻을 뜻은 없습니다.
나를 키워낸 땅에 나도 땀흘려 무엇인가를 키우고 싶을 따름이지요.

제초제를 뿌리거나 경운기로 갈아 엎어버리면, 몇 시간이면 족할 것을, 굳이 괭이로 땅을 파고, 호미로 풀을 매고, 또 삽으로 흙을 퍼올려 둑을 만들어갑니다.
부모님이 일구었고, 조부모님이 일구었고, 증조, 고조가 일구었던 땅.
농경민의 후예인 손자가 오늘은 젊은 들소처럼 일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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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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