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너머 저 편에 아무 것도 없다"

김지하 시집 <화개> 펴내

등록 2002.07.02 14:45수정 2002.07.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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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 표지
<화개> 표지이종찬
길 너머
저편에
아무 것도 없다

가야 한다
나그네는 가는 것
길에서 죽는 것


길 너머 저편에
고향 없다

내 고향은 길

끝없는 하얀 길

길가에 한 송이
씀바귀
피었다.

(김지하 '나그네' 전문)



<오적>으로, 아니 최근에는 율려를 이야기하는 생명 시인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 김지하의 신작시집 <화개>(실천문학사 7000원)가 나와 독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번에 펴낸 신작시집 <화개>는 실로 오랫만에, 아니 지난 번에 펴낸 <중심의 괴로움> 이후 8년만에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는 시편들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빼곡히 실려 있다.

총4부로 구성된 이 시집의 제1부에는 '한식청명' '구구' '밤 산책' 등이 실려 있으며 제2부는 '낯선 희망' '지는 봄꽃' '저녁장미' 등이, 제3부는 '아내에게' '초겨울' '소박하다면' 등이, 그리고 제4부에는 '詩' '신새벽' '가야의 산들' 등의 시편들이 '길 가에 한 송이/ 씀바퀴'처럼 자연스러이 피어나 있다.

또 시인 자신이 오래 전에 쓴 시들이어서 그런지, 이 시편들을 읽으면 마치 철 지난 꽃이 저만치 홀로 피어나 있는 것같은 착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시인이 친 난에서 풍겨나는, 그런 묵향 같은 그윽한 향내가 난다.


"이 시편들은 지금으로부터 5년에서 7년 전(대략 1995년에서 1997년 사이)에 씌어진 것들이며, 4부의 시편들은 재재작년과 재작년(대략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씌어진 것들이다."

이처럼 시인 김지하가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번 시집 <화개>에 실린 시편들은 시인이 예전에 쓴 원고를 정리하다가, 그 동안 시인 자신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시편들, 오랫동안 꽃봉오리만 맺은 채 시인의 서재에 갇혀 피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편들이 마침내 시인의 손에 의해 <화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
새파란 별 뜨듯
붉은 꽃봉오리 살풋 열리듯

아아
'花開'

('花開' 일부)


그렇다. 시인 김지하의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에서 "새파란 별 뜨듯" 고요하고도 잔잔한 빛을 뿌리며 떠오르는 "새파란 별"들이 마침내 "캄캄한 허공" 속에서도 이 세상에 찬란한 한줄기 빛을 뿌리듯이, 시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던 시의 꽃들도 마침내 만개를 하여 냄새나고 지저분하기만 한 이 세상 곳곳에 대자연 그대로의 싱싱한 향기를 흩뿌린다.

신경림 시인은 "스스로 고뇌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번에 시인 김지하가 펴낸 시집에서는 그 동안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런 이미지, 풍자와 해학이라는 낱말 속에 감추어진 그 강인하고도 비판적인 이미지라든가, 한때 "죽음의 굿판 집어 치워라"라며 내뱉던 그 무시무시한 독설 같은 낱말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화개>는 시집 제목처럼 시편들 모두가 일시에 꽃봉오리를 열어 만개를 하고 있다. 김지하의 이번 시편들은 어떤 이론에 대한 고집이나, 어떤 대상에 대한 강한 부정이나, 어떤 사상에 대한 강요가 없다. 마치 오랜 수행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선과(善果)처럼, 아니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되는 천부경의 진리처럼, 삶과 생명 그리고 우주만물의 질서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 즉 해탈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에게 오늘의 우리 사회는 헤어날 길 없는 우울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우울은 슬픔으로 깊어지면서 새로운 긍정의 바탕이 된다" 그렇다. 문학평론가 김우창 선생의 지적처럼 시인 김지하가 꿈꾸는 세상은 선승이나 도인들이 추구하는 그런 해탈의 세계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석가모니처럼 그 해탈의 법을 사람들에게 펼쳐 또 다른 이 세상의 해탈을, 해탈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빗소리 속엔/침묵이 숨어 있다//빗소리 속엔/무수한 밤 우주의 침묵이/푸른 별들의 가슴 저리는 침묵이/나의 운명이 숨어 있다...빗소리는 그러나/침묵을 연다//숨어서/숨은 내게 침묵으로 연다/나의 침묵을 연다.('빗소리' 일부)

이 세상에 내리는 "빗소리 속엔/ 침묵이 숨어 있"지만 시인 김지하에게 있어서 그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그 침묵 속에는 우주만물의 침묵이 숨어 있으며, 그 우주만물의 침묵 속에는 그 우주만물 속에 포함된 온갖 삼라만상의 침묵이 숨어 있는 것이다.

또 그 침묵 속에는 인간의 운명이 숨어 있으며, 당연히 나의 운명도 숨어 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침묵 속에 또 하나의 침묵, 즉 움직임, 다시 말하자면 삼라만상의 생로병사가 끝없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황토>(1970) 이후,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1982), <검은 산 하얀 방>(1986), <애린>(1986) 등의 시집과 장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6), <별밭을 우러르며>(1989) 등을 펴냈으며, 담시집으로는 <오적>(1993)과 <중심의 괴로움>(1994) 등이 있다. 이밖에도 대설 <南>(전5권, 1994년 완간), <나의 어머니> (1988), <밥>(1984),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84), <남녘땅 뱃노래>(1985), <살림>(1987) 등 많은 책을 펴냈다.

화개

김지하 지음,
실천문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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