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직 교사이자 고3 수험생을 둔 학부형입니다. 학교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이태 동안 학교운영위원회 교원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시인으로서의 작은 재능을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반 아이들의 생일 때마다 그들의 삶을 시로 엮어 선물로 전해주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아들아이의 바른 자람을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는 평범한 아버지입니다.
어제 저는 저녁뉴스를 통해서 장상 총리서리 임명 동의안이 부결되어 국정 운영에 심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교사로서 또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인사 청문회가 내린 결론대로라면 장상 총리서리의 인준 거부의 원인은 개인의 도덕성과 신뢰성 결여에 있습니다.
저는 묻고 싶었습니다. 지금 배움의 길에 있는 청소년들이 장차 어른이 되어 장상 총리서리처럼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심판 받는 자리에 서 있게 되었을 때, 과연 몇 명이나 그 통과의례를 마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단상을 내려올 수 있을 것인가?
교사로서 그런 비관적인 견해를 갖게 된 것은 지금 우리 교육이 아이들의 도덕성 문제에 관한 고민이나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제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지금 방학중에 일선 학교에서 파행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특기적성교육(보충수업)과 자율학습입니다.
상급관청의 방침이나 원칙을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감사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아무런 마음의 가책이나 아픔이 없이 아이들에게 공문서 위조를 강요하고 있는 우리 교육계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학부형들이나 학생들도 범법행위가 분명한 공문서 위조를 하나의 관행으로 받아들이고 별 마음의 동요 없이 응해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도덕성 불감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 학급일지라는 장부가 있었습니다. 학급 서기를 맡은 학생이 정규수업을 비롯하여 학급에서 일어난 하루의 일을 기록하는 장부인데, 거짓 기록이 문제였습니다. 학교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시정이 바뀔 수도 있는데 학급 서기는 그 사실 기록을 하지 않고 교무를 담당하신 선생님의 지침에 따라 허위기록을 해야했습니다. 물론 감사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정당한 사유를 말하면 될 법도 한 사안마저도 학생들에게 허위기록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지금 학교에 학급일지라는 장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없어도 아무런 불편이 없는 장부이기에 전교조와 도교육청과의 단체협약을 통해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불필요한 담임 업무가 하나 줄어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문서 위조를 배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사라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학교라는 사회가 자기 성찰이 가능한 지식인들이 모인 곳이라면 아이들의 도덕성 해이를 조장할 수 있는 장부는 벌써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어야 옳았습니다.
지난 달, 저는 순천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몇 분 선생님을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때가 때인 만큼 방학중 특기적성 교육과 자율학습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데 그 자리는 한 마디로 파행적인 보충·자율학습에 대한 성토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해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 정도가 예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심지어는 냉방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찜통 더위 속에서 거의 전교생을 대상으로 오후 6시 반까지 자율학습을 강행하고 있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자율학습비 징수를 금지한 상급관청의 지침도 무시한 채 말입니다(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받은 답변서에서는 자율학습비 징수가 금지되어 있더군요).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 자리에 동석한 선생님 한 분은 격한 목소리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금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문서 위조를 비롯한 특기적성교육과 관련된 모든 파행적 관행들을 상급관청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선 학교로 감사를 나간다고 해도 이미 서류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도록 해놓기 때문에 서로 알면서도 덮어주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말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문서 위조는 크게 두 가지 유형입니다. 특기적성교육이나 자율학습을 희망하지도 않는 학생들에게 강제로 희망서를 내게 하는 것이 그 첫째 유형인데, 그것은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거나 직접 면담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둘째는 학생들의 희망 과목 선택에 있어서의 허위 조작 사례입니다. 특기적성교육을 실시하려면 먼저 학생들이 희망의사를 묻고 희망 과목을 받아 반을 편성해야합니다. 그리고 정규수업이 끝나면 편성된 반으로 교실을 옮겨 수업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당연한 과정을 거쳐서 특기적성교육에 임하고 있는 학교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입학식 다음날부터 특기적성교육을 강행하고 그 계획은 다음에 형식적으로 짜서 감사 대비용으로 비치해두는 학교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한 파행이 서류상으로는 문제가 없어서 적발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관행을 쇄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이를 적발해내고 시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선, 학교에서 오셔서 서류만 뒤적일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직접 만나 보시면 학교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특기적성교육 희망조사서 서류를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검토하시면 될 일이기도 합니다. 같은 반 아이들의 희망 과목이 하나 같이 동일한 과목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학교가 특기적성반을 따로 만들지 않고 평상 수업 대형으로 특기적성수업이 아닌 보충수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파행의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학교장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학생들에게 공문서 위조의 부도덕한 행위를 강요하거나, 적절히 차단하지 못한 우리 교사들도 책임도 크다 하겠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도 한때는 그런 공문서 위조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처벌을 받을 각오로 이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사실을 아셨으니 일선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에 관련된 파행과 불법행위를 뿌리 뽑아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사실, 보충 자율학습 문제가 한 칼에 쳐서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사안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관청의 비현실적인 지침이나 수십 조가 넘는 사교육비 문제, 혹은 일부 학부모들의 그릇된 인식으로 인한 과열 경쟁심리 등이 실타래처럼 얽혀져 풀기 어려운 난제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사안들도 학교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전한 의견들을 모아 방법을 모색해간다면 만족할 만한 답안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령, 보충수업이든 자율학습이든 학생들의 희망을 받아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인문고 학생들은 강제하지 않아도 상당수가 스스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시간만큼만 해주면 될 일입니다. 거기에 욕심을 부려 무조건 전체 학생이 해야한다고 괜한 고집을 부리면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삶의 요구와 내용이 다양한 아이들을 한 곳에 가두고 같은 내용의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욱이 특기적성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이 자신의 특기적성을 스스로 개발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좁은 견해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학생 개인의 자유의사를 강제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모름지기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의 인격과 주체적인 삶의 동기를 지닌 한 인간으로 여기면서 학생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학생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삶의 연륜이 부족하고 거기에 사안이 너무 중대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교육감님께 무례를 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육계의 후배로서 언제라고 저를 꾸짖어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교육장님께서 취임하시면서 특별히 '실력 전남'이란 구호를 내거시고 낙후된 전남교육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애쓰시고 계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일선 교사로서 전남 교육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의 몫을 해보리라 다짐도 해봅니다.
다만, 우리 모두 진정한 실력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차분하게 사색하고 고민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청소년기를 통해서 공명정대함과 호연지기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세계의 무대에서 진정한 실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자연과 환경과 이웃에 대한 총체적인 만남이나 경험이 없이 혼자만의 밀실에서 오로지 점수만을 따기 위해 단편적인 지식을 암기해온 아이들에게 나라의 장래를 맡길 수 있을 것인지, 행복이 삶의 어느 갈래에서 오는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물질적인 성공을 과연 진정한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입니다.
이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장상 총리서리의 임명동의안 부결사태를 지켜보면서 솔직히 애석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어느 누가 그분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격한 마음으로 교육계에 던지는 이 아픈 돌멩이도 결국에는 부메랑이 되어 제게 돌아와 꽂히고 말 것입니다. 그 아픔을 감내하고자 하는 것은 제 자신도 어느 누구에게도 돌을 던질 수 없는 죄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존경하는 교육장님께 외람되이 올린 말씀에 대하여 깊은 이해와 용서를 청하는 바입니다. 사실은 교육현장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저희 교사들의 잘못을 교육감님께 떠넘기는 식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무례함을 용서 빌면서 이만 줄일까 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길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남 교육청 홈페이지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