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의원님, 어디서 뭘하고 계십니까

'경선지킴이' 정 의원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등록 2002.08.05 11:20수정 2002.08.06 16:47
0
원고료로 응원
이 글은 시사평론가 유시민씨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당시 '경선지킴이'를 자처했던 정동영 의원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로, 유씨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편집자 주>

지난 4월 21일 경기경선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정동영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지난 4월 21일 경기경선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정동영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정동영 의원님, 안녕하십니까.
저, 유시민입니다.
이 무더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건강하시죠?

홈페이지 게시판이 무척 활발한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정 의원님을 좋아하는 분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군요.

학교 선배 되시고, 또 잠깐이기는 하지만 저도 방송물을 먹은 터라 방송계 선배라고도 할 수 있겠죠. 아직 술 한 잔 함께 한 적은 없지만, 정서적으로는 무척 가깝게 느끼고 있습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시사평론가나 칼럼니스트로서 하던 일 다 집어치웠습니다. 인터뷰나 뭐 그런 일로는 다시 뵐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칼럼 집어치우면서 민주당 욕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제 성질을 잘 다스릴 만큼 성숙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오늘 저는 잠시 주말 시간이 난 김에 갑작스럽게 공개된 게시판을 통해 편지를 드립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도 답답해서 하소연 삼아 쓰는 편지입니다.

정 의원님은 지난 봄 민주당 국민경선 지킴이를 자임하면서 끝까지 뛰셨습니다. 정 의원님의 능력이나 철학에 회의를 가진 사람들 중에도 그런 자세만큼은 높이 평가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 의원님의 이미지는 방송앵커 출신의 잘생긴 젊은 정치인과 아울러 국민경선을 완주한 대통령 도전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정 의원님의 정치행로에 중요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터놓고 여쭈어 보겠습니다. 정 의원님의 국민경선 지킴이 역할은 경선을 완주한 순간 끝난 것입니까? 지난 석달 동안 낙선자인 이인제씨 진영이 조선일보와 똑같은 논리로 당선자인 노무현 후보를 공격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같은 편에 섰던 동교동계의 정균환 의원 등이 어떤 모양이 될지도 모를 신당을 하겠다며 노 후보의 후보 선사퇴를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들에게 그럴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보십니까? 이것은 경선불복이 아닙니까? 그들이 힘으로 밀어붙여 노 후보를 낙마시킨다면 이것은 국민경선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 의원님은 이 모든 것이 윤리적 정치적으로 등가적인 정치인들 사이의 세력다툼이라고 보십니까?


지난 4월 13일 민주당 충북경선 개표결과 발표후 노무현-이인제 후보와 악수하고 있는 정동영 후보(가운데).
지난 4월 13일 민주당 충북경선 개표결과 발표후 노무현-이인제 후보와 악수하고 있는 정동영 후보(가운데).오마이뉴스 이종호
저는 정치인이 아니라서 정 의원님이 처한 상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긴 미래를 내다보며 꿈을 추구하는 분인 만큼 당을 함께 하고 있는 분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인제씨와 동교동계가 저지르고 있는 갖가지 반칙과 해당행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 의원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정 의원님이 보시기에 노 후보가 대통령후보로서 많은 결함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런 반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정 의원님의 태도를 보면서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나는 더이상 국민경선 지킴이가 아니다. 국민경선을 함께 완주했던 당선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단지 지지율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후보 자리에서 밀려나도 내가 나서서 그걸 막아야할 의무는 없다. 이런 것입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더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나는 국민경선 지킴이 역할을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 노 후보가 별로 믿음직하지 않고, 지켜주려고 나섰는데 지키지 못하면 함께 정치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고, 혹시 정몽준씨를 후보로 하는 신당이 만들어진다면 그쪽에 가담하는 것이 좋은 점이 있어서 미안하지만 그 의무를 수행하지 않겠다.

만약 두번째 경우라면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설사 노 후보가 밀려난다고 해도 정 의원님은 국민경선 지킴이로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국회의원 오래 하는 게 꿈인 분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죠. 하지만 언젠가 나라를 이끌어 보겠다는 포부를 가진 분이라면 편한 길보다는 옳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노무현 후보는 여러 개인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대통령후보가 되었습니다. 정 의원님이 국민경선 2위 낙선자로서 국민경선 지킴이를 자임하면서 궁지에 몰린 노 후보를 돕는 것은 매우 떳떳한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로 인해 잠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치혁명"을 내걸었던 국민경선 후보로서 일관성 있는 처신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제가 건방지게 정 의원님께 뭘 가르치려고 한다는 오해는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저 제 견해를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낙선하셨지만 국민경선 유세와 토론에서 정 의원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정 의원님이 하신 말씀들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4월 7일 경북경선 연설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노무현, 정동영, 이인제 후보.
4월 7일 경북경선 연설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노무현, 정동영, 이인제 후보.오마이뉴스 권우성
정 의원님이 어제 소리 높여 외쳤던 정치혁신 주장과 민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시대적 정치행태를 묵인하는 오늘의 행동은 태평양만큼이나 거리가 멉니다. 어떤 논리로도 메울 수 없는 거리입니다. 저는 이 거리가 발생한 원인을 찾을 수 없어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무더위가 열흘은 더 갈 것입니다. 에어컨 없이도 열흘만 견디면 아침 저녁 서늘한 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경선을 국민사기극으로 만드는 민주당의 이른바 "반노" "비노세력" 의 행태는 삼복더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이것을 침묵으로 방관하고 있는 정 의원님을 보노라면 이 고통이 무척 길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더러 격한 표현이 있었던 것을 너그러이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답장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직접 홈페이지 게시판을 드나드는지 모르겠기에 이 편지를 정 의원님이 보실지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대통령에게 인적쇄신을 요구했던 그때의 그 기개를 되찾으시기 빕니다. 건강하십시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2. 2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3. 3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4. 4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5. 5 "김건희·명태균 의혹에...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 "김건희·명태균 의혹에...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