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과 한국 페미니즘

여자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좋다?

등록 2002.08.05 17:15수정 2002.08.0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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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 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결국 '부결'로 마무리되었다. 그와 함께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 탄생도 꿈으로 끝났다.

국회의원들이 아주 오랜만에 상식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고,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장상씨 개인적으로는 총장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면 여생을 명예롭게 편히 보냈을 것을, 공연히 레임덕 정권에 끌려들어 부도덕한 인간 취급을 받게 되었으니 인간적인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 바는 아니다.

장상씨 정도면 한국 상류층의 '표준'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도덕성을 지닌 사람에 불과하니까. 그녀보다 더 문제 많은 사람이 한국 상류층에 숱하게 많다는 것도 아마 다들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측은지심에서 하는 소리지만, 여성 인사가 몇 배는 더 부도덕할 남성 의원들에게 '상류층 세계에선 흔한' 문제를 갖고 공격받는 모습이 특히 안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상 총리 인준 부결의 타당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에 대한 여성계의 반응이다. 장상씨의 총리 지명 당시부터 그녀의 문제점이 하나씩 드러나는 동안에도 여성계가 보인 반응은 환영 일색이었다.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에 일조할 것'이란 장미빛 전망부터, '김대중 정권의 마지막 치적이 될 것'이라는 '용비어천가'까지 온갖 찬사가 여성계 반응을 대변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좋아할 일이었던가. 임기 말 식물 상태에 빠진 대통령이 여론 물타기용으로 여성을 지명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좋아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총리 임명이 언제는 국면 전환용이 아니었느냐는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왕 임명할 거면 잘 나갈 때 하지, 왜 최악의 상황에서 위기 모면용으로 지명하는가'라는 질문에는 할 말이 없지 않을까. 한국 여성이 그 정도로 구차하게 공직을 구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허운나 의원처럼 전자 민주주의에 앞장서는 여성도 있고, 추미애 의원처럼 젊은 나이에 여당 최고위원 자리에 오른 여성도 있다. 여전히 여성의 입지가 좁은 것은 사실이지만 총리 자리를 구걸할 정도로 상황이 형편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여성계가 그 '모두가 기피하기에 어쩔 수 없이 지명한' 총리직을 일제히 환영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막가파식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수밖에는 없겠다.


정말이지, 한국의 페미니즘은 왜 이런 식으로밖에 안(못) 하는가? 장상씨를 둘러싼 일련의 여성계 반응은, 얼마 전 박근혜씨 지지 논쟁과 함께 한국 페미니즘의 어두운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여자라서 더 가혹하게 검증하는 것 아닌가'라는 식의 반응. 얼마나 애처로운가. 그럼 여자니까 덜 야박하게 검증해 달란 얘긴가. 한국 페미니즘의 수준은 그 정도인가.

'그보다 이전 총리들은 더 부패했었다'는 반응도 마찬가지다. 그럼 이전에는 부패한 총리들이 부결을 면해 왔으니, 이번에도 부패한 총리를 임명해야 한단 얘긴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부터 다시 읽어야 할 소리다.

'문제가 많지만, 첫 여성 총리 지명자라는 점을 감안해서 승인했으면 한다'는 말은 또 어떤가. 김활란도 첫 여성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면 승인했어야 했을까. 장영자도 첫 여성 총리로 지명되었다면 통과시켰어야 했을까.

잘도 내세우던 합리성과 공정성은 대체 어디다 내던졌던가.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조차도 그런 망발들을 쏟아냈으니, 한국 여성계는 철저히 아전인수식으로 움직이는 집단이었단 말인가. 여자는 부패해도 봐줘야 한다? 여성 권익을 위해서는 한 번은 눈감고 넘어가야 한다?

급기야 '아들 국적 문제는 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혹은 '위장전입은 큰 죄가 아니다. 문제는…' 하는 식으로 장상씨의 의혹들을 부분 비호하는 논객들마저 나타났다. 물론 어떤 사람이 아들에게 미국 국적을 준 것은, 그 문제 하나뿐이라면 큰 흠결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어떤 사람이 친일 인사를 기념하는 행위를 했더라도, 햇볕 정책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 왔다면 애국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이리저리 위장 전입을 했더라도 시부모와 친부모를 둘 다 모시고 사는 효심을 보였다면 흠을 덮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흠결들 여럿이 장상이라는 한 인간에게서 한꺼번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한가지 팩트(사실)를 가지고 한 인간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팩트를 종합해서 한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린 경우라는 이야기다. 아들 국적과 영주권 취득에서 나타나는 '공직자로서의 국가관 부재',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의혹에서 나타나는 '천민 자본주의 백태', 말 바꾸기와 책임 전가로 상징되는 '성실성에 대한 의문부호', 거기에 정책 현안에 대한 보수적인 견해와 친일 인사 기념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층 옹호와 수구적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동시에 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데 어째서 큰 문제가 아닐까. 사람이 잘못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잘못을 적게 범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장상씨의 경우는 의혹들의 유형이 한 가지 큰 줄기를 띄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류 기득권층의 이익에 철저히 기댄 인물상'이 바로 그것이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케이스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진보적'이어야 할 여성계가 '수구적'인 인물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옹호하고 환영하기 바쁜 것일까.

한국 여성계는 여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는 존재란 말인가. 여자가 대통령 하는 것이 여성계에 이롭다는 이유로 '여자 박정희'를 지지하겠다지 않나, 치마 두른 기득권층 남성을 환영하겠다지 않나, 임기말 정권의 판단 착오를 좋다고 적극 지지하지 않나.

여성계여, 제발 이러지 말자. 가뜩이나 멍청한 남자들 때문에 나라가 '개판 오분 전'인데, 여자들까지 이렇게 막 나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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