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핸드백을 가슴에 안고

평범한 한 가장의 오래 기억될 만한 휴일 일기

등록 2002.08.18 17:41수정 2002.08.23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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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이 찍은 '뿌리공원'앞 호수 풍경
큰 아들이 찍은 '뿌리공원'앞 호수 풍경윤승원
모처럼 외식을 하자고 할 때 우리 가족들은 의견이 구구하다. 단 한 번에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어렵다. 아내는 아내대로, 큰아들은 큰아들대로, 평소 가장 과묵한 둘째 아이도 제 입맛에 마땅치 않은 음식 메뉴를 누군가 거론하면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런 집안 실정이다 보니, 명색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몇 안 되는 식구 의견조율하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하물며 한 나라를 경영하는 지위가 높으신 분들은 얼마나 어려울까? 엉뚱하게도 높은 자리에 앉은 분들의 고충까지 염려해주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오늘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사정이 달랐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멀리 임금님 걱정까지 해 드릴 필요 없이, 오늘은 내 한 마디 제의에 온 가족이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따라 준 것이 자못 흐뭇하기만 하였다.

비록 가난한 가장의 지갑이 바닥이 난들 어떠랴. 가족 모두의 건강한 웃음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대전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라고 식구들이 인정하는 중국 음식점에 갔다. 자장면도 다 같은 자장면이 아니라고 했다. 그 집 자장면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데는 식구 모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공원 호수의 아름다운 정경

서두가 길었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진부한 자장면 이야기가 아니다. 모처럼 만족스럽게 포만감을 느낀 우리 가족들은 음식점에서 나와 안영동 뿌리공원으로 향했다. 아내의 제의였다. 그곳에 대한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단지 '공기가 맑다'는 것뿐이었다.


방학중에도 두문불출 독서에 빠져 피서 나들이 한 번 하지 않고 있는 대학생 큰아들, 매일같이 늦은 귀가로 한 주일 내내 얼굴조차 보기 힘든 고3 둘째 아들, 무슨 일이 그리 바쁜지 매일 같이 종종걸음으로 살아가는 집사람. 그리고 아직 여름휴가도 내지 못하고 노상 머리가 복잡하다고 하는 이 사람.

가족 구성원이 모두 이렇다보니, 휴일에 '공기 맑은 곳'을 찾아간다는 것은 남달리 신선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대도시라고 하는 대전의 외곽에 이런 곳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주변 경관이 매우 수려한 계곡과 한적한 언덕에 자리한 시민공원. 그 앞 파란 호수에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정겨워 보이는 오리 모양의 보트가 있었다.

4인 승 오리 보트.
30분 짜리와 1시간 짜리로 구분하는데, 즐기는 시간에 따라 이용료도 달랐다.

평소 어느 유원지에 가더라도 이런 놀이기구를 선뜻 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이들도 그렇다. 이제 아비보다 더 훌쩍 커 버린 두 아들 역시 이런 놀이기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아비가 앞장서 아이들 앞에서 동심(童心)이 될 수밖에.

"저거 한 번 타볼까?"

그러자 아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른 때 같으면 '시원한 그늘에 앉아 남들 타는 거나 구경하자'고 할 아내가 오늘은 적극적으로 손사래를 치지 않는다. 그런 표정은 '한 번 타보자'는 긍정에 가까운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그동안 함께 살아 온 사람의 '감'이다.

"1시간 짜리는 너무 길고, 30분 짜리를 타자."

그러자 대학생 큰아들이 멋쩍어 하며
"제 나이가 몇 개(?)인데 저걸 타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집을 나서서 예까지 오는 동안 이 가장의 제의에 아무런 이의 없이 지금까지 순조롭게 잘 따라 준 가족들의 기꺼운 표정이 참으로 고마웠으므로, 큰아들의 저런 반응 역시 '한번 타보고는 싶은데, 주위의 눈을 의식하면 어색할 것 같다'는 뜻으로, 적극적인 부정의 의사 표시는 아니라 판단되었다.

표를 샀다. 아내의 의견에 따라 30분 짜리 오리보트.

식구들 모두가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 가족이 이런 보트를 타는 것은 처음이다. 자리를 함께 하기 어려운 가족끼리 이렇게 호젓한 호수에서 보트를 타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보트를 타면서 가족들과 나눌 의미 있는 말도 미리 준비

나는 먼저 보트에 올라타면 이 소중한 시간에 두 아들에게는 무슨 의미 있는 말을 건넬까 미리부터 준비했다. 또 아내에게는 이 십여 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아기자기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니, 오늘 이 귀하고 멋진 공간에서는 무슨 말인가 오래 기억될 의미 있는 말을 해줘야지. 조금 낯간지럽더라도, 근사한 말 한 마디 건네야겠다고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그런 저런 즐거운 생각을 하며 우리는 선착장에서 무려 30여 분 동안 순서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착장 마이크를 통해 우리 가족 순번인 71번을 호출하였다. 수상 안전요원은 원색의 스폰지 조끼(구명조끼)를 입으라고 했다.

네 식구가 구명조끼를 입고 선착장에 대 놓은 보트에 오르려고 하는데 수상 안전요원이 갑자기 가로막았다.

어린이를 포함하여 4명은 승선이 가능해도, 성인만 4명은 규정상 승선인원 초과라는 것이었다.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4인승 보트에 3인만 허용한다니...

보트 안에는 엄연히 네 사람이 탑승 가능하도록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린 네 식구가 모처럼 함께 하기로 한 의미 있는 시간이요, 소중한 공간인데....

그러나 안전요원은 엄격했다. 보트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정 중량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난감해 했지만, 안전요원에게 사정을 하지는 않았다.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는 안전요원의 말에 단 한 마디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아쉽지만 아내가 양보했다. 그러면서 아내는 "나는 무서워서 그런 것 타기 어려워" 했다.

나는 적이 서운하여 "그럼 내가 내릴게" 했다.

그러자 아내는 한사코 말리며, 입었던 안전조끼를 벗어 놓았다. 그리고는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나는 이 핸드백이 거추장스러워 안 탈래" 하면서 순간의 멋쩍음을 모면하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트는 수상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네 식구 중 세 식구만 태우고 야속하게 미끄러져 나갔다. 구명조끼까지 입고 무려 30여분 이상 기다렸던 아내를 놔두고 보트는 그렇게 미끄러져 나갔다.

이런 소중한 공간에서 어떤 의미 있는 말을 할까 미리 준비해 둔 나처럼, 아내도 무슨 말인가 준비했을까?

나는 선착장에 서있는 아내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두 아들이 열심히 페달을 밟아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보트가 그다지 흥겹지 않았다.

함께 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밝은 표정과는 달리, 우리 3부자는 그저 '바람이 시원하다'는 말밖에는 특별한 느낌을 나누지 못했다.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페달을 밟는 두 아들에게 내가 제의했다.

"얘들아, 벌써 10여 분이 지났다. 엄마에게 핸드폰으로 연락해라.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나머지 시간은 짧지만 늬덜 엄마를 태우고 한 바퀴 돌아라"

가족 사랑은 함께 나눌 때 의미가 있어

그러자 둘째 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으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아빠가 선착장에서 기다리래. 곧 간다구!"

두 아들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이윽고 선착장에 닿으니, 아내는 벌써 구명조끼까지 차려 입고 승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보트에서 내리니, 아내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오르면서 내게 핸드백을 맡겼다.

"그 속에 중요한 거 많이 들었으니까 잘 가지고 있어요."

나는 아내의 핸드백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더위가 확확 달아오르는 선착장 입구 콘크리트 계단에 앉았다. 오리처럼 물 위를 동동 떠다니면서 모처럼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표정을 감상하는 일은 내가 보트를 타는 일보다 더 큰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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