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의 방북, 어떻게 볼 것인가?

부시 행정부의 태도가 핵심 변수 될 듯

등록 2002.09.02 12:32수정 2002.09.0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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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연합뉴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가들의 외교전이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남북관계가 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통해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고, 오는 9월 17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로써 '2003년 위기설'이 나올 만큼 암울해 보였던 한반도 정세가 대화 분위기로 급반전하게 되었고,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의 중심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북미관계가 여전히 불투명하고, 동북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미국이 동맹국인 남한과 일본의 '독자' 외교를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지도 미지수이기 때문에, 향후 정세를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렇다면, 기대와 우려, 대화와 갈등이 교차하고 있는 한반도는 어디로 갈 것인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동북아에서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될 북일정상회담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 생명을 건 고이즈미의 결단

우선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대외정책에 편승해온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 결단의 배경과 의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나의 정치 생명을 걸고 가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히고 있기도 하다. 이는 동시에 이렇다할 성과가 없을 경우 총리 자리까지 내놓아야 하는 정치적 도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고이즈미의 방북 배경에는 우선 일본 국내정치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회복과 구조개혁이 답보상태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지지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 외치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해보겠다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즉 대북정책과 관련해 지금까지와 같이 부시 행정부의 눈치만 보면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할 경우, 한반도 정세가 호전되면 호전되는대로, 악화되면 악화되는대로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남북관계와 북러, 북중 관계가 급진전돼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 유럽까지 연결되는 '철의 실크로드'가 추진될 경우, 동북아의 경제구조에도 적지 않은 파장이 불가피하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동북아 경제를 주도해온 일본이 팔짱만 끼고 있으면, 일본의 경제회생은 더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여기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바로 북일관계 정상화인 것이다.

반대로 '2003년 위기설'이 현실화될 경우 일본이 직면하게 될 딜레마를 사전에 해소하기 위한 측면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이라크 다음에는 북한'이라는 인식이 커져왔고,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일본은 미국 주도의 대북한 군사행동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문제의식이 커져왔던 것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의 특성상 북일정상회담의 의제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북일정상회담이 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포지티브 게임'이 될지, 제로섬 게임이 될지, 아니면 회담을 안 하니만 못한 '네거티브 게임'이 될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나 북일정상회담이 양측 지도자 모두에게 '운명을 건 결단'이라는 점에서 '네거티브 게임'으로 끝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일단 북일간의 핵심 변수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의혹(행불자)' 문제 및 일본의 과거사 사죄 및 보상 문제간의 극적인 타협 가능성에 모아지고 있다.

특히 고이즈미 총리의 입장에서는 납치 문제와 관련해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할 경우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일본 내의 혹독한 비난여론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이를 잘 알고 있을 김정일 위원장이 납치 문제와 관련해 일본측의 요구를 대폭 수용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 북한이 납치 문제와 관련해 극적인 양보를 한다고 해서 일본이 과거사 사죄 및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정부의 의지를 떠나, 전후 일본체제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미일관계'라는 핵심 변수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시 행정부는 일본의 독자외교를 허용할 것인가?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에 평양 방문에 이어, 미국에게는 또 한번의 '쇼크'를 줄 것으로 보인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이 미국이 21세기 군사전략의 핵심으로 내세워온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의 '김빼기' 역할을 하고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을 확산시킨 역할을 했다면, 일본 총리의 9월 평양 방문은 부시 행정부가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이라고 일컬은 '테러와의 전쟁'에 차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이라크와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 근거로 핵, 생화학무기,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제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대량살상무기 위협 제거를 대북정책의 초점으로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남북관계는 물론, 북일관계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의 해결 여부와 관계없이 진전될 경우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고, 자칫 북한문제와 관련해 동북아에서 고립되는 상황에도 직면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북한의 우방이었던 중국과 러시아가 최근 대북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남북관계도 정상화의 길로 접어든데 이어, 일본마저도 대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설 경우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 미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상황이 오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동북아에서 '고아'가 되는 일이 없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부시 행정부 역시 북미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구축 움직임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시 행정부가 적어도 클린턴 행정부 때 북한과 합의하고 협상한 내용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부시 행정부가 동맹국들인 남한과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외교에 제동을 걸어 대북강경노선의 한미일 공조체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조기 핵사찰 수용 및 미사일 수출 중단 등이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남북관계 및 북일관계 급진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현재로서는 '후자'의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대외정책 전반이 그렇듯이 부시 행정부 내에서는 여전히 대북 협상파보다는 대북 강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북미간의 핵심 현안인 제네바 합의 이행 문제와 관련해, 유력한 협상안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조기 핵사찰 수용'과 '미국의 대북전력손실 보상'을 맞바꾸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북한의 미사일 수출 중단에 대한 보상안도 내놓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초미의 관심사는 일본 정부가 대북 독자외교를 어느 수준까지 나설 것인가에 모아지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수용해 북일정상회담에서 대량살상무기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구체적인 양보를 요구하고 이것이 관철될 때까지 북일국교수립을 질질 끌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문제는 북미간의 협상에 맡기고 국교수립에 박차를 가할 것인지를 주목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를 잘 알고 있을 일본 정부가 '방북'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또 하나의 주목해야 할 배경은, 일본이 북한의 핵,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적극적인 중재자로 나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지리적으로 북한에 인접한 일본으로서도 북한의 핵, 미사일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경우 미국보다 훨씬 큰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코 제3자가 아니다. 더욱이 일본은 경수로 사업비의 약 12%인 10억달러를 부담하고 있어 경수로 사업 지속 여부도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 역시 그동안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미국의 일방주의와 북한의 자주권이 충돌하면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핵, 미사일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 해결 없이 일본 내의 강경 여론을 설득하기도, 부시 행정부의 압력을 뿌리치기도 쉽지 않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일본 정부의 북일정상회담 추진 배경에 이와 같은 측면이 반영되어 있다면, 그동안 미국 주도의 한미일 대북공조체계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남북, 북일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에게도 대북강경책을 완화시킬 것을 남한과 일본 두 나라가 함께 요구할 경우,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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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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