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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달고나'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그 물건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또 그 이름도 꽤 오래 전부터 들어왔건만 얼마 전 인사동 골목에서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 이름이 그 물건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에 얽힌 추억들을 공공연히 되새기기 어려웠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겠지만, 사실 내가 알고 있던 그 물건의 이름은 '똥과자'였다.
스테인리스 국자에 찻숟가락으로 설탕 두어 개를 올려 연탄불 위에 달군다. 그리고 그것이 밑바닥부터 타서 눌어버리지 않도록 나무젓가락 따위로 동그랗게 저어준다. 그러다가 그 설탕이 모두 녹고, 끓어올라 구워지는 설탕의 고소하고도 달콤한 냄새가 진동할 때쯤 젓던 나무젓가락으로 소다를 두어 번 찍어 섞어 저어주면 이름처럼 야릇한 황토색이 번져가고, 조금 더 달구면 이내 꾸둑꾸둑한 설탕과자가 만들어진다. 까맣게 구워지는 설탕국자 위로 하얀 소다가 그리는 고운 궤적은, 마치 검은 커피 속으로 뭉게뭉게 무늬를 남기는 크림을 닮았다.
그리고 그것을 서늘한 철판 위에 '탁' 쳐서 펼쳐 놓은 다음, 주인 아저씨가 손잡이가 달린 동그란 쇳조각으로 꾹 눌러서 호떡처럼 납작하게 모양을 만들면 금세 굳어 딱딱한 과자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굳기 전에 별이나 눈사람, 혹은 나비 날개 모양 따위 단일폐곡선을 찍어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 아저씨가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고, 길거리음식치고는 특이하게도 직접 조리해 먹는 '셀프서비스'식으로 파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꼭 대학로 점집처럼 생긴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불붙은 연탄 서너 개와 조리용 국자와 나무젓가락이 담긴 물통, 그리고 설탕과 소다통이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든 과자 위에 모양을 찍는 과정만큼은 주인이 직접 해야만 했다. 그것은 주어진 선대로 똑바로 잘라내는 데 성공하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어먹을 수 있다는, 일종의 복권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철 모형을 너무 꼭 찍어서 틀을 확실하게 만든다면 꼭 그만큼 주인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손실이 늘어나는 셈일 것이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여 신중하게, 살포시 눌러주게 되어 있다.
그러면 학원 갈 일도 없고, 어차피 바쁠 것 없던 변두리 꼬마녀석들은 어느 집 대문 앞이건, 신작로를 내느라 잘라낸 가로수 둥치건 아무데나 동그랗게 모여 앉아 심혈에 심혈을 기울여 손끝 발발 떨어가며 모양대로 잘라내곤 했다.
그래도 꼬박꼬박 이상 없이 월급을 가져오시는 아버지 덕분에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내 주머니는 가난했다. 그것은 아들 용돈 주는 데 헤프지 않았던 부모님 때문이기도 했지만, '백원만, 백원만'하고 치마꼬리에 매달리거나 이런 저런 핑계로 속여 돈을 얻어낼 주변머리나 배짱이 없었던 내 탓이기도 했다.
그래서 문구점에서 흔히 하던 '뽑기'라든가, 혹은 병아리나 석고 인형이나 불량학용품 따위 잡상인들이 아이들을 불러모을 때마다 나는 뒷줄에 엉거주춤 서서 '이거 뽑아라, 저걸 골라라' 훈수나 하는 쪽에 들었다. 그래서 꽤 많은 경우 '똥과자'도 직접 만들고 모양대로 잘라내는 주체이기보다는 잘라져나오는 별 모양 주변의 쪼가리들을 얻어먹는 쪽에 속했다.
손가락에 침 착착 발라가며 정성껏 잘라내 나눠주는 착한 친구들. 워낙에 약간의 소다 외에는 전적으로 설탕으로 이루어진 이 과자는 아주 조그만 파편만이라도 혀에 닿으면 충분히 달았다. 그것도 불에 구워진 데다가 너댓 녀석이 머리가 닿도록 모여앉아 각자 흘려댄 군침이며, 또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돌아가는 소다 젓가락 따라 저도 모르게 굴려댄 눈알만큼 녹아든 무시무시한 공력(功力) 때문인지, 그
것은 그냥 설탕보다도 열 배 스무 배 달고, 또 고소했다.
아마 그것도 부모님이 교회에 가고 안 계신 일요일이나 수요일 어느 때쯤이었겠지만 몰래 부엌에서 혼자 연탄불 위에 설탕을 구운 적이 있었다.
오십 원을 낼 필요도 없이, 그리고 설탕을 너무 많이 넣었느니 소다를 흘렸느니 득달같이 달려드는 도끼눈의 주인 눈치볼 것도 없이 그저 풍성하게 구워 만들 수 있는 것이 감격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부모님 오시기 전에 말끔히 먹고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수십 번 보아왔고 손으로 익혀온 중요한 한 공정을 빼먹고야 말았다.
국자에 찰랑찰랑할 정도로 욕심껏 쏟아넣은 설탕을 녹이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나는 소다를 준비하고 넣어야 한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그저 냅다 젓기만 한 설탕 한 국자는 녹아서 찰랑거리더니 넘치기 시작했고, 금세 까맣게 타서 눌어붙었다.
미처 황토색으로 변하지 못하고 곧바로 까맣게 굳기 시작한 설탕이 국자 안과 밖으로 엉겨붙는 동안에도 시계는 쉬지 않고 달렸고, 길어야 한 시간의 예배 시간과 왕복 몇십 분의 이동시간을 고려하더라도 곧 엄마는 들이닥칠 것이었다. 그래서 식은땀을 한참이나 빼고서야 나는 이것저것 모두 포기하고 우선 겁나는 대로 국자를 통째로 설거지통 속에 풍덩 담가버렸다.
그러나 아마도 바로 그 순간에 딱 달라붙어버렸을 설탕들은 아무리 수세미로 긁어대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이만저만도 아니고 욕심껏 채워넣은 그 그득한 설탕이 모두 늘어붙은 채 까맣게 변색된 국자. 그리고 아마도 진동했을 집 안팎의 설탕타는 냄새와 연탄가스.
별다른 설명이나 변명의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단번에 이해해버렸을 어머니는 그날만 해도 국자를 휘둘러가며 한참이나 화풀이를 했고, 또 아침저녁 밥상머리에서 국을 뜰 때마다 새삼 떠올랐다는 듯이 국자에 남은, 채 지워지지 않은 거무스름한 얼룩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온 가족에게 상기시키곤 했다.
'달고나'라는 이름도 괜찮다. 참 달았던 과자. '달다'는 형용사, 그것도 감탄사로 만들어진 그 단어를 어떤 음식의 이름에 붙인다면 제일 그럴 듯하게 떠오를 만큼 달콤한 음식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왜 하필 먹는 음식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싶은 이름, '똥과자'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가끔 개똥도 굴러다니던 골목길 어느 구석의 궁색한 연탄불과 새까만 철제 국자, 반씩 동강낸 것으로도 부족해 물그릇에 담가놓고 돌려가며 저어대던 꼬질꼬질한 나무젓가락들. 그저 달고 유쾌한 것보다는, 짧은 삶 속에서나마 맛볼 수 있었던 어느 굽이의 질박한 풍경을 통째로 떠올려주는 이름인 것도 같아서 말이다.
글을 쓰다보니 또 불쑥 그 맛이 떠오르고, 지금이라면 그런 실수 없이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꼭 어쩌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식기통을 한번 흘겨보니, 될 일은 아니다. 우리 집 국자는 플라스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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