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태우던 빈 유모차에 담긴 '모성'

영화 <집으로>는 현재진행형... 20만원으로 아이를 기르라고?

등록 2002.09.11 14:41수정 2002.09.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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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할머니의 빈 유모차에는 이제 손주 대신 말린 고추와 단감이 담겨져 있다.

할머니의 빈 유모차에는 이제 손주 대신 말린 고추와 단감이 담겨져 있다. ⓒ 조경국

제39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기획상, 각본상을 수상하며 2002년 상반기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영화 <집으로>. 글도 못읽고 말도 못하는 외할머니의 소나기 같은 내리사랑에 천방지축 못된 짓만 골라하던 상우도 결국 마음을 열게된다는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고 감동을 안겨줬다.


하지만 부모와 떨어져 도대체 재미있는 것이라곤 전혀 없는 산간오지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어린 상우의 정신적 충격과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야 했던 엄마의 고민,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키우게 된 어린 손자를 보며 자식들의 어려움에 가슴 아파했을 할머니의 고통이 영화의 유쾌함 속에 묻혀 버린 것은 유감이었다.

a 문부금 할머니.

문부금 할머니. ⓒ 조경국

만약 그 고민들까지 영화 속에 담겨졌다면 아마 이 영화는 관객들의 철저한 외면과 함께 개봉관 하나 잡지 못하는 '예술영화'나 '다큐영화'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나마 현실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해피엔딩을 즐기려는 관객들의 요구를 감독과 제작사가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집으로>를 보고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은 이 영화의 줄거리가 허구가 아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맡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 엄마들의 마지막 비상구는 할머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육아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엄마들에게 <집으로>는 오늘도 엄연한 현실일 뿐이다.

"자신의 사랑과 희생을 알아달라고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과 희생으로 성장한 자식들이 떠날 때 붙잡지 않고 떠나보내는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친다"는 이정향 감독의 헌사는 아이들을 시골 할머니에게 맡겨야 하거나 맡기고 있거나 맡겼었던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이 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다.

"아임이프 때는 아이들 형편이 어려워 둘씩이나 맡아서 키웠지"


IMF 체제의 시련 속에서 무너져 버린 가족은 얼마나 될까. IMF 체제 하에서 계속된 장기불황과 실직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길거리에 노숙자가 늘어나는 만큼 고아원이나 복지시설에 맡겨지는 아이들도 늘어만 갔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상황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고 사회문제가 됐다.

먹고사는 것조차 걱정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육아문제는 큰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고민의 해답은 고향에 있는 부모님이었다. 아이들과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슴 아프지만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은 부모님밖에 없었다.


a 정태연 할머니.

정태연 할머니. ⓒ 조경국

"그때는 정말 한집 건너 모두 손자손녀를 볼 정도였어. 지금도 손자들 봐주고 있는 집이 많이 있지. 아임이프(IMF)때는 아이들 형편이 어려워 나도 둘씩이나 맡아서 키웠어. 어쩌나 아이들이 맡기는데 힘들어도 키워야지. 모두 잘 커서 떠나보내고 나니 정말 섭섭하긴 했지만 아이들은 부모가 키워야하는 거야."

텃밭에서 잡초를 솎아내던 이순정(경남 진주시 정촌·66) 할머니는 외손주를 셋이나 키웠다. 맞벌이를 해야하는 딸들의 청을 이기지 못해 핏덩이였던 손자를 맡아서 키웠는데 이제는 유아원에 다닐만큼 건강하게 자랐다고 자랑을 했다.

품에서 떠나보내면 보기가 쉽지 않은지라 주말이나 명절 때나 되어야 손주들 얼굴을 볼 수 있어 서운하다는 이순정 할머니.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들이 키워야 제대로 자라는 법이라며 손주들을 태웠던 낡은 유모차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시골길을 가다보면 할머니들이 낡은 유모차를 끌고 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부모에게 손주들을 돌려주고(?) 남은 흔적인 이 유모차는 할머니들의 손수레가 된다. 말린 고추도 싣고, 토란 줄기도 싣고, 얼마 남지 않은 추석에 찾아올 손주에게 줄 단감도 싣는다. 엄마를 기다리며 울다 지쳐 잠이 든 손주를 다독거리며 태웠던 유모차에는 손주 키우던 이야기 보따리도 하나씩 실려 있다.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가시던 문부금(경남 사천시 축동·78)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손주를 키웠는지 기억도 못하셨다. "손주가 몇인지도 모르겠네. 아이들이 맡기면 키웠지. 예전에는 이 유모차에 태워서 동네도 한바퀴 돌구 했는데. 지금은 감이나 따서 나른다오. 요즘은 빈 유모차도 밀기 힘드니. 모두 장성해서 잘 크고 있으니 그럼 됐지."

육아보조금 20만원 지급은 현실을 무시한 처사

a 이순정 할머니

이순정 할머니 ⓒ 조경국

출산휴가가 3개월로 늘고 육아휴직 등 제도가 생겼지만 여성들에게는 아이 기르는 일은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영유아의 탁아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현실성 없는 육아비 보조로는 아이 키우는 일은 멀고도 험한 고행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현실은 비단 직장여성 뿐 아니라 전업 주부에게도 마찬가지다.

육아휴직을 가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최대 20만원의 육아 보조금 지급한다고 발표한 정부의 조치는 아이를 마음놓고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한달 우유값 기저귀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조금으로 직장을 떠난 여성에게 아이를 기르라는 것은 있으나 마나한 제도일 뿐이다.

이번 정부의 발표는 정착되지도 않은 육아휴직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육아휴직제를 반가워하지 않았던 사업주들은 아이 키운다고 회사를 쉬는 직원들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한 셈이다.

형편이 넉넉하거나 맞벌이 부부일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마음놓고 육아휴직을 낼 수 있는 직장여성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직장과 가정을 모두 지킬 수 없는 엄마들에게 결국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직장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는 것.

아이의 손을 잡고 할머니 '집으로' 향해야 하는 엄마가 있는 한 '모성'을 배려하는 육아제도는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

a 할머니는 육아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엄마들의 마지막 비상구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할머니 ‘집으로’ 향해야 하는 엄마가 있는 한 ‘모성’을 배려하는 육아제도는 아직 멀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할머니는 육아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엄마들의 마지막 비상구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할머니 ‘집으로’ 향해야 하는 엄마가 있는 한 ‘모성’을 배려하는 육아제도는 아직 멀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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