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미안해

<사진보며 미소짓기 2>

등록 2002.09.23 19:48수정 2002.09.2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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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현주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일어나 정신 없이 출근을 하던 날이었다. 뭔가 허전하다고 느낌이 드는 순간 잔뜩 찌푸린 하늘이 눈에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동전만한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 원래 비맞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깨에 메고 있는 내 친구 사진기가 '비' 이놈하고는 앙숙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아침부터 생돈(?)을 드린 나는 회사에 출근해 죄없는 재떨이를 붙들고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나보다 아침잠이 훨씬 많은 손전화가 주머니에서 울어댔고 오랜만에 일찍 일어난 손전화에 반가워 '거는놈숨겨주기'(발신자표시제한)에 연연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전활 받았다.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손전화에서는 어여쁜 아가씨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입가에 띤 미소에 채 주름이 잡히기도 전에 내 착각은 깨지고 말았고 이 아가씨는 아주 익숙한 말투로 "안녕하세요 고객님! 여기는 ○○텔레콤 홍보실 전○○입니다. 이번에 저희가 우수고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중이거든요..."하며 "친구 분들의 전화번호 10개와 이름만 말해주면 무료통화 100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귀가 솔깃했지만 일전에 "○○씨로부터 음성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라는 문자표시에 통화버튼 한 번 눌렀다가 몇 천 원의 정보이용료가 부과된 경험이 있는 나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하는데 왜 친구들 개인정보를 알려줘야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1분 전까지만 해도 천사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던 아가씨는 "그러니까 말해줄 거예요 안 해줄 거예요"하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곧 바로 난 "왜 큰소리를 내세요. 제가 무슨..."하며 말하려 했으나 상대방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고 전화기에서는 뚜∼ 소리만 들려왔다.

너무 황당했다. 일전의 경험 때문에 더욱 화가 나서 이동통신 회사 고객서비스센터에 항의 전활 했지만 본사 홍보과와 서비스센터를 돌려가며 책임을 미루는 직원들에게 1시간을 소비해야 했고 1시간만에 통화한 서비스센터 책임자는 지금은 법률적인 근거가 없어서 대응하지 못 하니까 억울하시면 개인적으로 수사기관에 의뢰해서 발신자정보를 알아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뭔가 아주 찜찜했지만 더 이상 통화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내 옆에 서 있던 나무 줄기에는 여러 명의 상담원에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적었던 글들이 있었고 그것을 지우기 위해 또 반 시간 정도를 보내야 했다. 결국 그 날 나는 1분짜리 전화 한 통화 때문에 2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화도 많이 나고 아침부터 기분도 언짢았지만 나무한테는 너무 미안해서 요즘도 가끔 수세미 자국을 다시 보곤 한다.
"나무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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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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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통신 기자를 거쳐 오마이뉴스 광주전라본부 상근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사 제보와 제휴·광고 문의는 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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