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모리스 교육부장관의 용기

등록 2002.10.29 19:51수정 2002.10.3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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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모리스(Esthel Maurice)는 영국의 교사출신으로 지난해 6월 토니 블레어 총리에 의해 발탁된 여성교육부장관이었다. 1년 6개월 동안 장관직을 수행해오다가, 최근 대입수능시험 채점 오류 등 일련의 '교육사고'로 사임 압력을 받아왔는데, 지난 23일 자신의 '능력부족'을 이유로 전격 사임했다.

물론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먼 나라 교육부장관 이야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 선진국 교육제도를 비교하거나 벤치마킹 할 때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마치 '약방의 감초'마냥 영국교육제도를 모자이크하고 있기 때문에 방만히 지켜볼 일이 아니다. 우리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영국 제도를 우리 실정에 억지로 끼워맞출 바에는, 모리스 장관의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먼저 벤치마킹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정치현실이나 교육여건을 돌이켜볼 때 너무나도 대조적이고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그저 신분을 보장받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치거나, 정책 책임을 물어 무조건 경질하고 보는 식의 경질이 아닌, 그야말로 아름다운 퇴장을 만들어 줄줄 아는 영국신사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되짚어보면, 우리 역사에서 여성장관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교육부만 해도 역대 44명의 장관 및 부총리 중에서 여성장관은 2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녀 구별 이전에 일단, 정부 차원에서 교육부장관만큼이라도 최소한의 임기를 보장해줘야 할 것은 현정부 들어서만도 무려 7번씩이나 장관이 교체되었으니, 평균 재임기간이 고작 6개월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임기를 최소한 1년만이라도 보장해준다면 지금보다 두 배 정도는 장관교체횟수를 줄였을 것이고 이에 따른 교육정책의 혼선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리스 장관의 1년6개월 재임기간은 우리 정치여건에 비추어볼 때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대중에 종종 회자되듯이 우리 교육의 꿈도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확신한다.

유능한 장관의 기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퇴장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역대장관들이 그러했듯이, 마치 정치수단의 희생양으로 온갖 수치와 불명예를 한 몸에 짊어지고 내쫓기듯 경질되는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았었다. 심지어 전화 한 통화에 정치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교육제도가 조석으로 바뀌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리스 장관이 블레어 총리에게 사임의사를 전했을 때 총리는 자신의 관저로 장관을 불러 1시간동안 면담했으나, 그 뜻을 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떠나는 그를 향해 블레어 총리는 "나는 그가 정부로 돌아올 것을 확신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진정 우리 정부가 벤치마킹하고 남을 일일 것이다. 그들은 찬사 받아 마땅할 영국신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속에 어정쩡한 한국양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위치에서든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차한 변명이나 핑계를 늘어놓기보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시인한 채, 물러날 시기와 자기의 능력을 언급할 줄 안다는 것은 정직한 삶을 반증하는 결과이다.


모리스 장관은 사직서에서“나는 교사나 교육 관련 공무원으로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잘하지만 거대한 부처를 전략적으로 운영하는 능력은 모자랐고, 나는 장관으로서 사람들의 기대만큼 능률적이지 못했다”는 말을 남기고 직원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 청사를 떠났다고 한다. 진정한 용기와 결단력이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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