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기념식에서 인권상을 받은 이회창 부친 이홍규옹. 작은 사진은 일제치하 검찰 서기 시절의 이홍규.
이회창 후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청백하고 고지식한 공무원이었다"면서 "당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은 반드시 끝까지 밀고 나갔고, 그래서 주위로부터 못마땅한 시선을 받은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증언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고문까지 받는 등 수난을 겪은 것도 바로 그런 아버지의 강직한 성격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이홍규씨도 1994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상부의 미움을 받았다는데 어떤 일들이었나"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변한 적이 있다.
"해방 후 광주지검에 근무할 때 땅부자인 모 정당 전남도지부장의 세무비리 뇌물공여 사실을 적발, 그 정당과 윗사람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구속기소한 일이 있었지요. 또 그 직후 청주지검으로 좌천돼 이승만 대통령의 친구였던 충북도지사의 독직사실을 밝혀내 역시 구속했습니다."
결국 이홍규씨가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직한 검사'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1)광주지검 검사 재직시 모 정당 전남도지부장의 세무비리 뇌물공여를 적발해 구속시켰다는 것과 (2)청주지검 검사 재직시 충북도지사의 독직사건을 적발해 구속시켰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홍규-이회창씨 부자측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재판기록이나 보도기사 등 '객관적 증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 취재진이 당시 발간된 신문을 뒤진 끝에 그것을 찾아냈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23일자에 실린 보도기사가 바로 그것인데, 당시 표기법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검사국에서는 11월 29일 광주세무서장 권중형 이하 10명의 세무관리, 부호, 실업가 등을 일제 검거하여 이홍규(李洪圭) 검사 담당으로 엄중 취조 중이던 바 10일 관계자 전부를 기소, 공판에 회부하였다 하는데 사건의 내용을 보면 전기 권 세무서장은 그 부하인 직세과장 김왕성, 간세과장 양기성 들과 같이 부호 고광표, 손종채, 지창선, 국승관(요리업) 김기호, 최금봉(주조업) 라종현, 임희택 등으로부터 총액 16만원의 뇌물을 받고 그들의 세금을 감하여 준 것이라 한다."
원래 이홍규씨의 한자 이름 표기는 '李弘圭'이긴 하지만 당시 기사에 나오는 '李洪圭'는 기자의 오기(誤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회창 후보의 회고록 등을 비롯해 당시 이홍규씨가 광주지검에서 근무했다는 기록이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홍규씨는 조선총독부를 대체한 미군정청 장관인 아놀드 미 육군 소장이 발동한 '임명사령 제64호'(APPOINTMENT NUMBER 64)에 의해 1946년 1월 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검사로 임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홍규씨가 앞의 인터뷰에서 거론한 "모 정당"은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와 조병옥(미군정청 경찰국 조선인 국장) 등이 리더로 활약하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월간조선> 1990년 10월호에는 "(이홍규씨가) 초임 검사 시절 당시 위세가 당당한 한민당의 전남지부장을 권력층의 압력과 김병로 당시 사법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했다"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홍규씨가 실제로 위의 기사에서 소개한 세무비리 뇌물사건으로 권력층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인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즉 고광표, 김기호, 라종현씨 등 8명의 뇌물공여자 중 이홍규씨가 언급한 "모 정당의 전남도지부장"이 포함돼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취재진이 가지고 있는 현대사 지식의 범위에선 현재까지 명확하게 확인이 안 된 상태임을 밝혀둔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홍규씨의 주장은 진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거니와, 그는 해방정국의 혼란함 속에서도 검사의 길을 올곧게 걸은 '강직한 검사'로서 널리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씨는 일반적인 세무비리 적발사건을 나중에 정치적으로 미화해 합리화한 셈이 된다.
이와 관련,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이 <동아일보>라는 사실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민당의 기관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던 '극우지'로써, 철저하게 친한민당의 당파성을 보였던 신문이다. 한민당을 조금이라도 공격하면 '빨갱이'로 몰아버리던 <동아일보>가 과연 한민당 지부장을 구속시킨 이 사건을 이렇게까지 감정의 동요 없이 보도할 수 있었을지 솔직히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 전후의 <동아일보> 성향에 대해서는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린 필자의 졸고 '대통령 선거와 언론-개가 주인을 무는 풍경'을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 <동아일보>가 '극우지'였다는 것은 1946년 미군정이 직접 조사해 분류한 결과임을 밝혀둔다. 참고로 당시 <조선일보>는 '중립지'로 분류된 바 있다. <조선일보>가 오늘날처럼 '극우지'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 등장 이후부터다. <조선일보>의 1933∼40년까지의 노골적인 친일·반민족 보도 성향과 별도로 박헌영 기자 등이 활동하던 1920년대의 반일 보도와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중립적 보도는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충북도지사 독직사건과 관련된 보도기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건의 내막과 관련해서는 오제도 검사가 <월간조선> 1997년 2월호에서 이홍규씨의 주장과는 다소 다른 '반론'을 펼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구속된 충북지사는 신의주 출신의 윤○○ 목사였다. 그는 영락교회 원로 목사인 한경직 목사보다 선배다. 충북지사로 있던 윤 목사가 미국의 구호물자를 팔아서 유용한 것은 사실이나 행정비에 보태 쓴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가 됐던 것은 도지사를 구속하려면 검사장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이홍규 검사는 검사장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새, 전격 구속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