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알라딘
오래 전 책장에 꽂아뒀던 이 책을 우연히 다시 꺼내어 보게 됐다. 다른 일 때문에 이리저리 관련된 글을 찾던 중 이 책이 눈에 들어 왔다. 한때 내 머리 속을 아름답게 채웠고 지금은 내 삶과 약간 무관해진 듯한 단어, ‘노동’.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그 노동을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에서 실현할 것을, 노동을 새롭게 재편할 것을 주장한다.
노동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희망을 잃어버린 노동사회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 모델을 찾아서!’라는 부제(副題) 역시 참신하지 않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많은 학자들과 운동가들이 '새롭고 아름다운 노동'이라는 이상을 추구해 왔다. 사실 이런 제목을 단 글들은 대부분 하나마나한 얘기들이나 예전에 나왔던 주장들을 되풀이하는데 그치기 쉽다. 하지만 벡의 글은 한국이라는 ‘지금 여기’에 두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 | | 울리히 벡(Ulrich Beck) 소개 | | | | 1944년 독일 포메른 주의 슈톨프에서 태어났다.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뮌헨대학교 사회학 연구소 소장이면서 런던경제학교 교수이기도 하다. 1986년 출간된 그의 저서 <위험사회>는 “제도 사회과학에 유성의 충돌과 같은 충격을 안겨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1997),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부인과 공저, 1997), <정치의 재발견>(1998),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2000), <지구화의 길>(2000)이 있다. 독일 바이에른 및 작센 자유주 미래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미래위원회 위원 활동을 통해 자신의 시민노동 모델을 발전시키기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 책날개 소개글 수정 | | | | |
현재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절반을 넘어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2년 9월 전체 임금근로자의 47.9%만이 상용직으로 임시직과 일용직 등 비정규직의 비중이 52.1%에 이르고 있다.
●[문화일보]2002-10-17일자 근로자 52%가 비정규직
이처럼 고용구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더 이상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통용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취업의 문이 갈수록 좁아짐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 역시 증가할 전망이다. 리크루트사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 직원의 17%가 비정규직(그중 여성이 65%)이고 그 비율은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일보]대기업직업 17% 비정규직…여성이 65%
이런 상황이다보니 이번 대선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위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적용’이라는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약속한 반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나 국민통합21의 정후보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와 사회당의 김영규 후보는 더 나아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겨레신문]이젠 정책선거다
과연 일자리를 늘리고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일까? 벡은 세계화 시대에 노동을 재편하는 방법이 세 가지로 나타난다고 본다. 하나는 자본의 입장을 따라 ‘시대의 흐름’이라며 눈을 감는 것, 두번째는 비정규직을 착취와 억압이라는 범죄의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세번째는 그 흐름의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벡은 마지막 방식을 택한다.
벡이 보기에 정규직 노동, ‘평생직장’을 통한 ‘완전고용’(실업이 없는 상태)은 세계화, 생태화, 디지털화, 개인화된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완전고용이라는 방식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마지막에는 쓰디쓴 신자유주의라는 약을 삼켜라, 그러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164쪽)는 해답으로 회피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벡은 비정규직 노동이라는 흐름을 무조건 막지 말고 그 물꼬를 터주되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자고 얘기한다. “처음부터 미리 공식 노동을 도피점으로 상정하고는 (겉치레 분석을 통해) 비공식 노동을 가치가 덜한 것으로 취급해 버리는 이는 사실상 ‘정규적 공식적 경제와 고용’이라는 모델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에 맞추어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사람을 ‘경계선 밖의 잔여물’ 정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181쪽). 즉 비공식노동을 경제활동의 잔여물로 취급하지 말고 그 기능과 역할을 인정하자는 논리이다.
벡은 이런 주장의 정당성을 ‘시간주권’에서 찾는다. 국민국가와 그 공간적 경계(국경선)에 기초한 ‘공간주권’은 세계화 시대에 무용지물로 변하기 쉽다(제 빠르게 치고 빠져나가는 투기자본을 국가의 힘으로 막을 수 없듯이). 벡이 찾은 돌파구는 시간이다. 자기 노동을 스스로 관리하고 조절하는 ‘시간주권’, 쳇바퀴 돌 듯 고정된 일상에 갇힌 노동이 아닌 ‘유연한 노동’, 벡이 추구하는 이상이다.
이런 주장은 다분히 공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벡 스스로도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서구적 척도의 비특권층에 해당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확산되어 있는 유토피아로서, 정규적인 취업노동의 구조와 여러 가치들은 바로 여기에서 부서진다. 하지만 그런 식의 논증을 펴는 사람은 순식간에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즉 그는 포스트모던풍의 낭만적 감상에 사로잡혀 비공식 고용의 조건들을 미화하고 있거나 신자유주의의 사기적 선전에 넘어갔다는 것이다.”(177~178쪽).
그래서 벡은 또 하나의 해법, 하지만 앞의 해법과 밀접하게 연관된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시민노동의 활성화’이다.
벡이 얘기하는 시민노동은 근대적인 노동사회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노동사회의 안티테제는 정치 지향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의식이 강한 정치적 시민사회이고, 정치적인 것에 대해 새롭고도 두터운 개념을 개발하고 시험하고 실현하는 ‘네 스스로 하라’는 문화이다.”(34쪽).
벡이 얘기하는 시민노동은 이런 것이다.
• 조직화된 창조적 불복종,
• 자발적인 정치적 사회적 투신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자체 결정 내지 자기 실현,
• 프로젝트별로 구속성을 가지며, 협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조직된, 제3자를 위한 노동으로서 공공복지 기업의 연출 아래 실행되는 것(228쪽).
이런 시민노동에 대해 시민수당(그 최저액은 실업수당, 실업보조수당, 사회부조금의 척도를 근거로 산출된다)을 지급하고 시민수당 취득자는 사회부조금이나 실업보조금의 수령자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에 유용한 활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이런 활동은 증명이나 인증서의 형태로 취업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한다. “시민노동 모델은 자율 조직, 자기 고유의 주동적 활동, 실험적 정치 등의 모습으로 개인주의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이런 점들을 공동 작업자나 사회부조 수령자들 같은 제3자의 욕구와 요구들에 조율시키는 형태로 나타나게 만든다.”(269쪽).
사실 이런 모델은 각종 정부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진행되고 있다. 행정자치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 공모를 받아 자원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는 시민노동과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이런 사업에 있어 벡의 강조점은 대중을 대신하는 노동이 아니라 대중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점에 있다.
시민노동은 취업노동을 대체하지 않고 그것을 보완할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 인식이다. 기존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인식은 새로운 실험을 막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먼저 필요한 것은 시민노동을 하는 사람을 실업자나 무능력자로 보지 않는 것이다. 고정된 직장이 있어야만 ‘사람취급’을 하는 사회적 인식, 고정된 시간과 고정된 자리를 가져야만 노동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이 변해야 한다. 취업노동만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노동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시민노동 모델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고 수많은 갈등이 잇달아 나타날지 모른다. 벡은 이런 갈등을 피하지 말고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갈등을 줄여야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대립과 차이를 억압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다양성과 차이,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는 갈등은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런 갈등을 표출하고 다루는 절차, 민주적인 절차를 확립하고 서로 만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모델이 모든 사회에 만병통치약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서구의 모델이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보장장치가 미약한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은 ‘설탕을 바른 독약’일 수 있다. 하지만 세계화 시대에 한국사회가 하나의 ‘섬’으로 떠 있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두 손을 들고 항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방식으로 싸울 필요도 있지 않을까?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시류를 타는 것은 분명 다르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소중한 만큼 유연한 태도도 필요하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벡이 직접 쓴 표현이다. “만국의 세계시민이여 단결하라(310쪽)”
덧붙이는 글 | ● 보너스 트랙: 고민해 볼 말, 말, 말
- 시민노동은 보수적일 수도 있고 혁명적일 수도 있으며,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 사전에 미리 정해진 진보적 목표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225쪽).
- 시민노동은 지속적으로 시작하는 정치를 제기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전망이 없다든가 좌절했다든가 하는 것에 대한 그릇된 확실성과는 반대로, 시작하는 정치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정치적 행위의 본질에 속한다는 점에 패를 건다(240쪽).
● 제목: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
● 저/역자: 울리히 벡 지음/ 홍윤기 옮김.
● 출판사: 생각의 나무
● 초판발행: 1999년 12월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 - 세계시민사회를 위한 비전
울리히 벡 지음, 홍윤기 옮김,
생각의나무,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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