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고 싶은 그대 때문에 흘린 눈물

노무현 후보 지지자로써 보낸 선거일의 기록입니다.

등록 2002.12.20 11:04수정 2002.12.20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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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뜨거운 무엇인가가 온 몸을 휘감는 열기를 느낍니다. 언제 이런 느낌을 가졌던가요? 87년 6월이던가요? 97년 12월이던가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비관론자는 아니지만 사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일 밤에 자막으로 뜬 속보를 보면서 여기까지였나 보다 우리가 지금 갈 수 있는 길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섬뜩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밝고 뉴스를 보아도 달라진 상황은 아무 것도 없고 머리 속으로 부지런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생각에 또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멀리 보이는 학교 투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난 지방선거와는 달리 길게 늘어선 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투표율이 높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지만 이것도 얼마 못 가 저조한 투표율을 알리는 뉴스를 봅니다. 다시 한번 절망이 엄습해 왔습니다. 고향의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쫑 난거지?"
"아니야. 이럴 때 노무현은 계속 이겼어"

혈혈단신 부산에 지역감정의 선거판을 바꾸기 위해 분투하다 끝내 정형근의 저격을 받고 쓰러지던 때, 그 바보스러움 때문에 우리 정치 초유의 팬클럽이 만들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지 않았나.

단기필마로 국민경선에 참여했을 때 이번은 아니야, 그래도 차기는 노려볼 수도 있어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세를 인정해야만 했을 때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승리를 이끌어 내지 않았던가, 두 번의 선거 패배로 벼랑에 몰리고 개혁 세력을 대표한다고 국민들이 믿던 미래의 유엔 사무총장께서 적진에 투항하였을 때도 그 어여쁜 돼지 저금통들이 노짱 앞으로 줄 이어 달려가지 않았던가. 그래도 높아지지 않던 지지율로 할 수 없이 단일화를 받아들였을 때,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귀환하던 그 어여쁘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끊임없는 위기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단추 하나도 잘못 끼워졌다면 이르지 못할 길이었습니다. 새로운 적들이 눈앞에 나설 때마다 그가 꺼내든 칼은 국민이 그에게 쥐어준 작은 단도처럼 위태로워 보일 뿐이었습니다. 몰랐습니다. 그가 최후에 의지하여 어려울 때마다 빼어든, 정치 변화를 원하는 국민이 쥐어준 단검 한 자루에 작지만 또한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 보검의 영험함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싶었습니다.

아이들을 앞세워 투표장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투표장으로 가는 이웃들을 만납니다. 겨우 인사만 하고 지나는 이웃들이었음을 어제처럼 후회해본 적도 그리 많지 않았던가 봅니다. 누굴 찍을 것인지 물어보고 이야기해보고 싶어졌습니다만 숫기 없는 제 입은 땅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1시경 아직 줄이 줄어들지 않은 행렬의 끄트머리에 서있으면서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줄이 더 길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더 기다려 투표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기다려 투표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투표를 끝내고 아이들에게 이끌려 서점을 기웃거리고 장을 볼 때도 마음은 온통 뭔지 알 수 없는 불안과 안타까움으로 뒤섞여 오락가락 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켭니다.


여전히 낮게 발표되는 투표율 자막이 화면의 아래를 지나갑니다. 큰 아이가 전화 왔다며 건네 준 휴대폰에 문자가 떠있습니다. 투표를 독려하는 전화를 주위에 하자는 긴급한 개혁국민정당의 문자가 들어왔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들 속에 내 작은 힘이라도 보탰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되었나 자책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전화를 걸 데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전날까지 청주에 계시던 아버님이나 주변의 절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그 당위성을 알려주려고 노력은 하였으나 지금 막상 떠오르는 상대가 없습니다. 무기력함과 초조함이 엄습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다른 나라와 다른지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프랑스처럼 사회 논의구조나 갈등 해결구조, 그리고 사회 시스템이 잘 마련된 나라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던지 서민들의 삶에는 큰 지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린 그렇지 않다. 아직 그런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우리는 사람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깐 누가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인지 고민하고 꼭 선거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볍다고 그를 비토하는 어른들에게는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그가 꺾지 않은 소신과 명분이 왜 지금 소중한지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고자 애썼습니다. 모두가 말하는 개혁의 내용과 속이 어떻게 다른지 아는 대로 전하고자 보고 싶지 않은 신문도 펼쳐가며 말문을 열고자 했습니다.

장모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투표하러 가는데 2번을 찍으실란다는 말씀이시랍니다. 작은 위안이 됩니다.

다섯 시를 넘은 시계가 점점 흘러갈수록 초조감이 더해졌습니다. 드디어 여섯 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 채널을 돌립니다. 세 방송사 다 기다리던 승리를 예견합니다. 미미한 지지율 차이가 불안하긴 했지만 일단 세 군데 다 기다리던 승리를 예견하는 터라 안도하며 개표방송을 지켜봅니다.

초반 개표결과에 불안해 아는 아내에게 현재 개표중인 선거구가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낮기 때문 일거라며 조금씩 올라가는 결과를 주목하자고 이야기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도 너무 미미한 지지율 차이가 혹시라는 불안감을 끝내 지울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다가 가시권에 추격하며 냉장고를 뒤져 맥주 한 캔을 꺼내어 놓았습니다. 무릎 앞에 맥주를 넣고 드디어 뒤집어지는 순간 힘껏 맥주를 땋습니다.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켜고 한숨을 돌립니다.

감격에 겨워하는 노사모와 지지자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힙니다. 당장 광화문에 달려가 그들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가만히 기쁨을 즐기고 싶어집니다. 여럿이 모여 기쁨을 함께하던 친구의 흥분에 겨운 전화를 받습니다. 아내는 참말로 참말로를 연발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올라가라 내려가라 표차를 표시하는 화살표를 보며 같이 외쳐주던 아이도 기뻐합니다.

당선소감을 밝히는 화면이 나오고 환호하는 지지자들의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잡혀집니다. 눈물겨워집니다. 달려가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포근하게 안기고 싶은 지도자라기보다는 왠지 꼭 안아주어야 할 사람처럼 그가 느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 험악한 정치판에서 그가 피운 촛불 하나가 끝내 꺼지지 않도록 그 빛이 사위어질 때마다 불안해하며 그를 지켜본 것이 짧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가고 시위와 파업 현장에서 원칙 하날 금과옥조로 지키려는 그를 보고 달걀도 맞고 악의에 가득 찬 수구 신문들의 논조를 대할 때마다 저러다 깨어지면 누구에게 또 희망을 걸어야하나 노심초사한 것도 여러 번 이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동지라고 믿었던 이의 배반에 분노한 수많은 이 땅의 사람들이 그를 지켜냈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정치개혁을 원한 수많은 이들의 열망도 있었고 수구세력의 재집권을 막기 위한 진보진영의 대안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난 그를 지켜낸 것은 국민뿐이었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그가 켰던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작은 촛불 하나, 그가 이루고자 했던 정치개혁에 대한 퇴행적 대세론자들에 대한 저항이 이어질 때마다 그를 껴안아준 것은 국민뿐이었다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가 더 소중하고 이제 그를 지켜보아야 할뿐이지만 이 땅에서 친일독재를 청산하고 군부독재를 끝내 거부하고 이젠 국민 정치참여시대를 연 수많은 국민이 진정한 승리자라고 믿습니다.

아침에 눈을 뜹니다. 문득 다른 세상이 열린 듯 환해집니다. 어젯밤에 감추어둔 눈물 한 방울, 차 안에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끝내 떨구어 버립니다. 진정 원하는 것은 끝까지 당신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국민들을 믿어 꿈꾸어 왔었던 희망을 이루도록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이 아침. 당신을 또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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