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생물의 건축학>은 다카시가 잡지에 기고한 글을 엮은 것입니다. 깊게 파고들기보다 넓게 다루려 합니다. '늘어뜨리는 집', '물 위에 뜨는 집', '땅 속의 집', '공기가 순환하는 집', '흙으로 짓는 집', '고층집', '사랑을 위한 집'이라는 테마들은 생물들의 우수한 건축법,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법을 소개합니다.
다들 어릴 적에 거미가 집을 짓는 광경을 유심히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무서움보다는 신기함이 앞섰죠. 어떻게 저런 얇은 실로 공중에 집을 지을까, 어떻게 저런 모양을 만들어낼까. 요즘 아이들은 그런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글의 서두가 재미있습니다.
한 중학교 교사가 새집을 만들라는 숙제를 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사람의 집 형태로 새집을 만들어왔다는 얘기를 합니다. 다카시는 그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근대적인 사고'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기계와 공학에 의지하게 되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생물에게서 배우는 법을 잊어버렸지요.
| | 글쓴이 | | | | 글쓴이/ 하세가와 다카시(長谷川堯): 시마네(島根)에서 출생하여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현재 무사시노 미술대학 교수이다. 저서에 <신전인가 옥사인가>, <건축-암컷의 시각>, <도시회랑>(마이니치 출판문화상), <건축의 현재>, <건축유정>(산토리 학예상), <건축의 생과 사>, <의사당으로의 계보>, <건축소요> 등이 있다. 옮긴이/ 박이엽: 1936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1960년대 초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였다. 드라마 <아차부인, 재치부인>, 다큐멘터리 <여명 200년> 등을 집필했으며 <에반젤린>,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늑대의 돼지꿈>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소개글 | | | | | |
다행히도 모든 사람이 잊어버리는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카시는 스페인의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이 생물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가우디가 지은 건축물의 특이하고 부드러운 외양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부 디자인이라고 하는군요. 그 건축물의 내부는 새들의 둥지처럼 "너무 딱딱하거나 날카로운 각 때문에 사용자를 적대하는 느낌을 주는 구성이나 재질감이 전혀 없는 상태"(39쪽)라고 합니다.
'생물건축가들'은 인간처럼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도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지요. 그것은 자연을 배제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자연을 담아내는 건축물을 짓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생물들이 사용하는 척도는 기하학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감각이지요.
"산개미나 흰개미는 그들이 쌓아올리는 둥지의 건평과 높이의 관계, 그리고 그 한도를 자기들이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신중히 판단하고 있으며, 바위제비는 모래땅의 벼랑 끝에 어느 정도의 구멍을 뚫어야 안전한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딱따구리는 부리 끝을 통해 나무 둥지의 강도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며, 두더지나 들개 등 땅속에 둥지를 만드는 동물들은 그들의 건축물에 가해지는 대지의 압축력을 몸으로 계산해 낸다. 한편 지상을 떠나 공중에 둥지를 트는 생물은 그들의 건축물에 가해지는 당기는 힘에 대한 계산 능력을 연마해 두어야만 할 것이다"(53쪽).
인간의 몸은 이런 감각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요?
몸으로 측정하고 판단한 자연적인 건축물은 인간이 지은 최첨단 건축물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는군요. 사실 인간의 건축물은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낭비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더 열등하다는 얘기지요. 다카시는 인간이 현대의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비판합니다.
"공학의 힘이라고 하는 마술이 약속한 터무니없이 불확실한 소재로 몸을 감싸고 있으면서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의상(즉 건축)을 걸치고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자연계의 지혜와 견실함밖에 모르는 동물 건축가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틀림없이 '벌거벗은 임금님'일 것이다"(136-137쪽).
벌거벗은 임금님의 왕국은 크고 높은 덩치만큼 위협적이죠. 그 속엔 주거공간이 가져야 할, 생물의 둥지가 주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없습니다. 다카시는 자연계의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하는 먹이사슬로부터 탈출하겠다는 인간의 오만함이 이런 위협적인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동물은 항상 일정한 포식자를 가까이 두고 산다. 이 포식의 관계는 자연계에서 일종의 사슬로 되어 있으며 자연계의 전체 조화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든 생물의 '삶'에서의 약속이라 할 수 있는 먹이사슬로부터 탈출하였다는 불손한 생각을 한 것은 일부의 인간 곧 권력층의 인간이며 그들은 스스로 습격은 할지언정 습격받지는 않는다는 믿음을 앞에서 본 것과 같은 '열주' 따위의 위협적 의장으로써 과시하려 한다"(238쪽).
자연과의 조화를 거부하고 자연을 공격하는 형태를 띠는 인간의 건축물. 생물의 둥지는 조화롭고 방어적인 것을 본질로 하는 반면, 인간의 건축은 배제하고 지배하는 것을 본질로 삼은 것이죠. 그래서 다카시는 "인간은 자신들이 자연 속의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실감하고, 그 작고 덧없음을 '아름답게'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가 근대 이후 우리의 감성 위에 켜켜이 쌓여 온 먼지를 털어 내어 투명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254쪽)이라고 얘기합니다.
<생물의 건축학>은 외국의 생물이나 일본의 건축물을 사례로 들고 있어 생소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저자의 관점이 자연보다 건축물 자체로 흘러 긴장감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일본 어투를 그대로 옮기는 번역도 조금 거슬립니다. 모든 것을 공간의 문제로 환원할 수도 없겠죠. 하지만 효율성과 기술, 소유 앞에 설 곳을 잃어버린 주거공간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재구성되어야 할 주거공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역시 중요할 것입니다.
▲황금가지
야스히로의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일본에서 유행했던 '마을만들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처럼 일본도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했던 나라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투기꾼들이 날뛰고 담합이 이루어져 곳곳에서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동구밖 과수원길을 부르며 걷던 마을이 헐리고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섰겠지요. 이런 '마을부수기'를 막기 위해 행정과 민간이 힘을 합쳐 마을을 다시 만드는 것이죠.
거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거시적인 계획과 미시적인 생활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 광역적인 도시계획을 생활에 맞는 주거환경정비계획으로 재편성해 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 생활 환경 만들기에서 출발하여 마을 만들기를 진행시켜 가는 것을 통해 주민들은 그러한 작은 활동들이 전체 계획과 어떻게 맞물리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지역주민들이 생활에 충실을 기할 수 있다. 자녀 양육, 여가, 노후 등 한 사람 한 사람의 주민에게 소중한 삶의 과제가 주민의 상호관계를 자아내는 마을 만들기 활동 안에서 풀리면서 고양되는 것이다. 셋째로 주민이 참가하는 마을 만들기는 물질, 돈, 제도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의존해서 사람살이의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즐기는 마음을 끊임없이 발휘할 수 있게 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살아 움직이는 마을 만들기에서는 제도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참가자들은 '영혼을 치유하는 유머'를 가지고 주체적이면서도 자유롭게 활동한다. 그런 가운데 '일상을 사는 충실감의 원천'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활동은 주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 관련되어 가는 것이다"(10-11쪽).
마을만들기는 물리적인 공간의 재편만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공간 속의 인간관계를 새롭게 형성하려는 것입니다.
| | 글쓴이 | | | | 글쓴이/ 엔도 야스히로: 교토대 건축과를 졸업, 구마모토대 공과 교수로 있으면서 일본의 여러 자치 단체의 요청을 받아 생활 공간을 계획하고 있다. 저서로 <이런 집에 살고 싶구나> 등이 있다. 옮긴이/ 김찬호: 1962년 대전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신학 쪽으로 시야를 넓히면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기독학생운동에도 참여했다. 일본 오사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연세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강의했다. 지은책에 <여백의 질서>, <사회를 보는 논리>가 있으며, 옮긴책으론 <작은인간>,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 등이 있다. 2002년 현재 서울시 대안교육센터 부센터장으로 있다. / 소개글 | | | | | |
아무리 좋은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 생활할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담지 못한다면 '편한 공간'일 수 없습니다. 편하지 않으면 그 속의 관계도 자연히 불편해 지지요. 지역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생각과 마음을 담은 곳이기에 형태는 아주 다양합니다. "마을 만들기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제삼자가 이성적으로 규명하는 것"(69쪽)이 아니랍니다. '나비가 춤추는 지역', '웅덩이가 있는 마을', '주민의 손으로 만들어진 고향 그림책', '집 안에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공동주택', '첼리스트 고슈들이 사는 집', '화로가 붉게 타오르는 집' 등의 테마들이 그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관계를 편안하게 만드는, 삶을 즐기는 공간이기에 자연과도 그런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 속에 "아름다운 거리 풍경을 시각적으로 사랑한다는 것, 강물이나 물고기에게 다가가 촉각적으로 생명을 느끼는 것, 바람 속이나 새 울음 속에 귀를 기울여 청각적으로 움직임을 아는 것, 술 저장고에서 흘러나오는 술냄새라든지 장어 굽는 냄새에 후각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리고 계절에 어울리는 술맛에 미각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 여기에는 오감을 통해서 자기 마을의 매력을 체험해 가려는 자세"(69쪽)가 있습니다.
그런 생태적 발상은 근대 도시문명이 배제한 물웅덩이나 진흙을 다시 찾게 합니다. 우리 몸의 70-80%가 수분이듯 인간은 물을 떠나 살 수 없고, 물 속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지요. '청결함' 혹은 '거추장스러움'을 이유로 메워졌던 웅덩이와 여울길을 살리려는 노력이지요. '청계천복원사업'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리라 생각합니다.
야스히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울길의 물웅덩이는 그림책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아이들이 물을 직접 접촉하는 기회를 늘이고, 물과 상호작용하는 몸의 감각을 통해 아이들에게 일종의 '자연성'을 회복하고 체득시키는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이러한 관계가 상실되어 가는 중에 여울길에서는 아이들이 물과 놀고 접촉하면서 '미지근함'이나 '차가움'이라는 생명 감각을 높여 간다고 생각한다"(189~190쪽).
<생물의 건축학>과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인간의 주거형태, 근대 건축이 빠뜨린 요소를 말해줍니다. 동물건축가들이 몸으로 구현하는 '생태적 상상력'과 지역주민들이 품고 있는 '자치적 상상력', 두 상상력은 딱딱하고 획일화된 주거공간, 배제하고 직선적인 주거공간을 '살만한 공간'으로 만들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생태적 상상력과 자치적 상상력은 개인의 '내밀함'이나 '소유'라는 욕망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진경은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에서 "주거공간의 역사는 사적 공간의 진화과정이 아니다. 우리는 주거공간의 역사를 발전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사적 욕망'이나 '사생활의 욕망'이라는 뿌리로 귀착시키려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결별해야 한다.…또는 사생활 내지 사적공간을 일종의 '인간 조건' 내지 주거공간의 초월적 목적으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분명하게 결별해야 한다.
'사생활'에 관한 19세기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의 방식, 새로운 주거공간을 사유할 수 있기 위하여"라고 얘기합니다. 이 두 권의 책은 그런 '논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
엔도 야스히로 지음, 김찬호 옮김,
황금가지, 1997
생물의 건축학
하세가와 다카시 지음, 박이엽 옮김,
현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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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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