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스타일이 있다니까

등록 2002.12.30 13:40수정 2002.12.3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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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아, 내일 머리 깎으러 가자."

제 말에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응, 머리 깎으면 할아버지가 잘생겼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께서 머리 깎은 녀석을 보면 늘 "어이구, 우리 손자. 머리 그렇게 깎으니 더 잘 생겼구나." 하신 것이 생각나는 모양입니다.

저는 그런 녀석을 보며 이제 제법 컸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처음 머리를 깎으러 갔을 때, 녀석은 한사코 엉덩이를 내밀며 이발소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울상까지 지으며 녀석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싫어, 나 머리 안 깎을 거야."

그런 녀석을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며 달래 간신히 이발소 의자에 앉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억지로 의자에 앉히기는 했지만, 녀석은 이발사 아저씨가 윙 하는 기계를 머리에 가져다대자 마구 도리질을 쳐댔습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기계로 깎는 것은 포기하고, 가위만으로 머리를 깎는 내내 제가 녀석의 머리를 꼭 잡고 있어야 했고,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당근과 채찍을 다 동원하고서야 이발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한번 그렇게 이발을 한 후부터 녀석은 머리 깎으러 가자는 말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장난감 자동차 사주기였습니다.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자동차입니다. 모형 자동차만 있으면 하루 종일 신이 나게 노는 녀석에게 새 자동차를 사주겠다는 것만큼 솔깃한 말도 없을테니까요.

"진형아, 자동차 사줄게 머리 깎으러 가자."
"머리? 자동차? 머리 깎으면 자동차 사 줄 거야? 그럼 난 지붕 없는 자동차 살 거야."

녀석은 순순히 따라 나서더니, 머뭇거리지도 않고 이발소에 들어가 신발을 벗고 의자에 올라서서 나무 받침 위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런데 이발사 아저씨가 기계를 들고 다가오자 녀석이 아저씨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기계는 싫어요. 가위로 깎아 주세요."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며 기계를 놓고 가위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래, 가위로만 깎을테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녀석은 머리를 다 깎는 동안 눈을 질끈 감고, 마치 고통을 감내하는 수도자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녀석을 보며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큰 아이가 네댓 살 무렵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부모 탁하지 않는 자식 없다더니, 어쩌면 너하고 똑같다니."

늦둥이도 그렇지만, 큰 아이도 어릴 때 간지럼을 유난히 많이 탔습니다. 목을 씻기려고 손만 가져다 대도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리며 도망치기 일쑤였으니까요. 늦둥이 녀석도 제 형에 질세라 간지럼 타기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여름에는 목을 못 씻게 해서 땀과 범벅이 된 때가 띠를 이루기도 합니다. 제 엄마가 야단을 치며 겨우겨우 씻는 시늉만 할 정도입니다.

"너도 어지간히 목을 못 씻게 했지. 개울가에 앉혀놓고 씻기려 하면 이 논두렁으로 도망치고, 저 논두렁으로 달아나서 한바탕 난리였는데, 자식 아니랄까봐 저 녀석도 똑 같구나."

소리소리 지르며 큰 아이 목 씻기는 집사람을 보고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생생한데, 둘째인 늦둥이 씻길 때는 그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어머니도 계시지 않구나 하는 비감에 젖기도 합니다.

또 이발 의자 위에 때가 반질반질한 나무 판자를 가로 걸쳐놓고, 그 위에 앉아 머리를 깎는 늦둥이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내가 다니던 안흥 시장의 그 이발소 풍경도 떠올랐습니다.

시장 중간쯤에 있던 그 이발소는 장날이면 머리 깎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람들이 몇, 긴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자욱하고 매캐한 담배 연기 이발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었습니다.

낡고 오래 된, 원래는 노란 색에 가까웠을, 그러나 오래 되어 군데군데 때가 타 갈색에 가까운 이발 의자와, 의자 옆에 달린 바퀴같은 모양의 회전대와, 그리고 어린 내가 보기에는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었던 몇 점의 시골 풍경이 그려진 액자들. 그리고 지금 우리 늦둥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때 낀 나무 받침대. 어머니는 제 어릴 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기도 하셨습니다.

"너를 처음 이발소에 데리고 갔을 때였지. 여자인 내가 언제 이발소에 가 본 적이 있나? 처음 들어간 이발소라 낯설기도 했지만, 온통 남자들 뿐이라 주눅이 들려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단다."

어머니는 이발사가 시키는 대로 저를 이발 의자에 걸쳐진 나무 받침에 올려놓고, 그냥 소파에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내외가 심할 때니, 더군다나 위로 사내아이라곤 길러 본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 이발소에 가셨으니 말 한 마디 하기가 힘이 드셨겠지요.

"그냥 알아서 깎아 주겠지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머리가 이상한 거야. 그래도 저렇게 깎나보다 하고 기다렸지. 머리를 거의 다 깎아 가는데 점점 머리 모양이 여자 애들 단발머리처럼 보이지 않겠니?"

어머니는 이발사 아저씨에게 용기를 내어 물어보셨답니다.

"상고머리가 왜 이렇대요?"

그러자 이발사 아저씨는 깜짝 놀라며 되 물었다는군요.

"아니 얘가 여자 애가 아니란 말입니까? 난 여자 앤줄 알고 단발머리로 깎았는데."

위로 딸만 셋, 늦게 낳은 아들 녀석 머리를 또 딸 머리로 만들뻔 했다며 어머니는 웃곤 하셨습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늦둥이 녀석은 찍소리 안하고 머리를 다 깎았습니다. 처음에는 안 깎겠다고 도리질을 치고, 아이스크림이다 장난감 자동차다 하며 구슬려 깎게 하고, 조금씩 기계를 대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어지더니, 이제는 얌전하게 앉아 다 깎을 때까지 몸부림 한 번 치지 않는 모양을 보며, 정말 많이 컸구나, 저렇게 낯설고 겁나는 일을 조금씩 겪어 나가면서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하는 느낌도 갖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다 깎고, 과자 한 봉지를 들려 집으로 들어섰는데. 제 형과 엄마가 문을 열어주며 칭찬과 질문을 던져댑니다.

"아유, 우리 진형이. 머리 그렇게 깎으니 정말 멋있네."
"떼 안 쓰고 잘 깎았어?"

녀석은 제 형과 엄마를 번갈아 보고 싱글싱글 웃으며 자랑스레 대답합니다.

"나 기계로 머리 깎았다아. 멋있지?"

그런 녀석이 귀여운지, 제 형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마디 합니다.

"기계로 깎았어? 무섭지 않지? 우리 진형이 이제 다 컸네."

그러자 녀석이 갑자기 제 형의 손을 홱 뿌리치며 소리를 지릅니다.

"형, 나도 스타일이 있다니까."

그리고는 형이 쓰다듬던 앞머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마구 치켜올립니다.

"뭐어? 스타일이 있다고?"

우리 가족은 모두 그런 녀석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립니다.

녀석은 지금도 머리를 내리 쓰다듬으면 "나도 스타일이 있다"며 한사코 앞머리를 치켜올립니다. 아내는 "요즘 애들은 참..."하며 혀를 차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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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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