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지 않으면 몸살로 앓아 누울
지리산, 아! 그 지리산이 지금...

[시&사진] 계미년 첫날 지리산에서 만난 사람, 눈보라

등록 2003.01.01 17:11수정 2003.01.1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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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눈보라 속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오마이뉴스 조호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새해 첫 날이면 지리산에 오릅니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살아온 만큼 부끄러워라, 그대들 수만의 죽음이 가엾어서 눈 덮인 지리산이 가엾어서 그리하여 온전하지도 맑지도 못한 싸움과 영혼이 부끄러워서 새해 첫날, 지리산의 햇살에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뉘우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지리산을 밟았습니다.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들도 지리산에 오릅니다. 첫 해 아침에 해돋이를 보며 무병장수(無病長壽)와 가족의 안녕 혹은, 새해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아들과 딸들의 손을 잡고, 아내와 어버이와 함께 어울려 산에 오릅니다. 민족의 영산에 오르는 것은 뉘우치기 위함입니다. 소원을 빌면서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그 무엇을 빌든지 소망하든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람다운 사람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마음과 마음이 보태졌으면 좋겠습니다.

새벽 어둠을 뚫고 노고단을 오르는 사람들...
새벽 어둠을 뚫고 노고단을 오르는 사람들...오마이뉴스 조호진
단독 산행을 위해 새벽을 깨워 섬진강을 달렸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성삼재까지의 도로가 폭설로 끊기면서 차량통제가 이루어졌습니다. 당혹스러웠습니다. 쉽게 오르기를 바랬던 간사함이 잠시 흔들렸습니다. 돌아갈까, 아니 돌아갈까... 노고단의 일출을 보기 위해 산길을 걷는 사람들은 희뿌연 어둠을 밟으며 하얀 입김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위와 눈보라에 흔들렸던 마음이 대구에서 왔다는 초등학교 일 학년의 씩씩한 발걸음에 부끄러웠습니다.

계미년(癸未年)의 아침은 더디게 왔습니다. 어둡고 컴컴한 산길을 일행도 없이 홀로 걸으면서 느꼈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은 묵묵부답(默默不答)을 배우기 위함이라는 것, 사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새처럼 재잘거린다는 것은 호흡이 가빠서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살을 에이게 하는 눈보라가 바람으로 하여금 귓볼과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더 숙이며 피하려했지만 어림도 없는 수작이었습니다. 겨울 나무들은 희디 횐 옷을 걸치고 산에 오르는 마음들을 검문하고 있었습니다.

미명의 노고단.
미명의 노고단.오마이뉴스 조호진
아침 6시 무렵에 노고단 산장에 닿았습니다. 아직 일출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남았습니다. 허기진 사람들은 컵라면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추위를 달랬고 야간산행을 한 듯이 보이는 사람들은 산장 계단에서 잠시 풋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우글거리는 인파였습니다. 산이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찾아온 사람들, 산은 사람이 그립지 않은데 사람은 산이 그리운 것입니다. 눈꽃과 바람소리, 춤을 추는 바람과 눈꽃의 춤사위를 무심히 지켜보는 사람들... 잠시 후, 이들은 산을 박차고 떠오르는 붉은 햇살에 함성을 지르고 소원을 빌며 올 한해는 기쁜 일만 많기를 빌고 또 빌 것입니다.

노고단 산장에서 만난 윤영민(42·민주노동당 전남도지부 준비위원장)씨는 '결심'하기 위해 산에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그 결심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 농민, 서민이 중심 되는 진보정당을 뿌리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패거리들이 판을 치던 정치를, 야합과 배신과 음모로 날을 새던 신물나는 정치를 진보정당이 대체해야 한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들.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들.오마이뉴스 조호진
거기다 토호세력이 나누어먹던 지방정치를 견제하기 위한 분권운동을 본격화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합이기주의에 빠진 노동조합을, 낡은 관념적 운동을 반성하고 살아 숨쉬는 운동으로 대중에게 신뢰받아야 할 때라고 다짐했습니다. 특히, 노동자 계급 속의 계급으로 나뉘어져 천대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는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국사범으로 운동권 동지였던 아내와 아들을 위한 가정경제를 바로 세우는 일이 숙제라고 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도, 자신감 있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그와 함께 산에 오른 대학후배 정정섭(40·구례농민회 부회장)씨는 지리산 자락에 산다고 했습니다. 뻔질나게 도회지를 꿈꾸는 사내들과 달리 지리산에서 자식을 키우고, 힘에 부치지만 토호세력과 싸우며 산다고 했습니다. 그의 계미년 희망도 세상을 올바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농민회가 군정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지역의 시민단체가 서로 연대하며 힘을 모으는 것이 올해 사업목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어제이죠 사실은)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여 솟아라 아, 그러나...
해여 솟아라 아, 그러나...오마이뉴스 조호진
잠겼던 노고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일출을 위한 몇 시간뿐입니다. 국립공원 직원들이 작은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산에서 고함을 지르지 말고 조용히 기도만 하고 내려와 달라"고 당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부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속으로 "괜한 간섭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눈보라를 뚫고 노고단을 올랐습니다. 눈썹까지 눈발이 맺히고, 손은 동상에 걸린 듯 얼어붙었습니다. 사람들은 미끄러지고, 뒹굴며 노고단을 올랐습니다. 도저히 해가 뜰 것 같지 않은 일기였습니다.

〈풍속 → 초속 10m〉〈기온 → 영하 22°〉〈체감온도 → 28∼30°〉

해는 솟지 않았지만 해를 마음에 담았다.
해는 솟지 않았지만 해를 마음에 담았다.오마이뉴스 조호진
노고단 정상에 올랐습니다. 살을 에이는 바람과 눈보라에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이었고, 몸은 눈바람에 휘청거렸습니다. 일출을 기다리는 인파들은 난간을 붙들고 산 아래에 눈을 박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라도 소망을 빌어야합니다. 늘 다지고 새기지만 세상에 내려가면 사흘을 못 가고 봄눈 녹듯이 유야무야 흩어지는 맹세가 올해만큼은 제발 반듯이 지켜지기를 첫 햇살과 약속하기 위해 사람들은 눈보라의 모진 방해에도 견디고들 있었습니다.

살 에이는 눈보라, 그 기억으로 다시 오르리라.
살 에이는 눈보라, 그 기억으로 다시 오르리라.오마이뉴스 조호진
임재호(36·전주시 덕진구)씨는 큰아들(초등3년) 작은아들(초등1년) 그리고 조카(고등3년)와 처제(30)와 함께 노고단을 올랐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새해 소망을 묻는 질문에 "부모님과 가족이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서민을 잘살게 하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북한 핵 문제가 좋게 해결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작은아들의 소망은 "친구하고 안 싸우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것이었고 처제의 소망은 "오늘 같은 기분으로 여행을 다니며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라는 것이었고 덧붙여 "올해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산불처럼 붉은 기운이 어른거렸으나 끝내...
산불처럼 붉은 기운이 어른거렸으나 끝내...오마이뉴스 조호진
단전호흡 단체인 '풍류도태허수련원'의 원장인 김충구(38·광주)씨는 단원 20명과 함께 노고단을 올랐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 매년 새해 첫 산행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올해는 더욱 "수련을 통해 몸과 정신을 다스리고 깨달음을 얻도록 매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물질만 추구하지 말고 영(靈)적인 신장을 통해 바른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털어놓았습니다. 단원인 전태성(22·호남대 법학과 1년)씨는 "시험을 잘 봤으면 좋겠고 또 소파개정으로 자주권을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었습니다.

연인의 웃음, 눈꽃 같은 사랑, 첫 해 같은 마음이길...
연인의 웃음, 눈꽃 같은 사랑, 첫 해 같은 마음이길...오마이뉴스 조호진
그들은 산 사람이었습니다. 산이 좋아서 산에서 일한다고 직업에 대한 애정과 보람을 밝혔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산을 학대의 대상으로 삼는 탓에 산은 갈수록 신음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르는 게 아니라, 산의 생명들을 야위게 하는 산행(山行)에 대해 반감을 표시했습니다.

손영조(38·지리산국립공원남부관리사무소)씨는 "새해를 맞아 잠시 개방하지만 일출이 끝나면 또 다시 통제할 것"이라면서 "자연생태계 훼손이 심각한 노고단은 지난 91년부터 자연휴식년제를 도입해 산행을 통제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노고단의 동·식물 등 생명체들은 매우 민감해서 사람들의 방해에 훼손을 당하고 있다"면서 "사람들은 산에 올라와 '야호'하고 소리치며 스트레스를 풀지만 동·식물들은 그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일 학년도 노고단을 올랐다. 전주에서 온 가족일행.
일 학년도 노고단을 올랐다. 전주에서 온 가족일행.오마이뉴스 조호진
지리산국립공원은 지난 2001년 9월에 '반돌' '반순' '장군' '막내' 등 반달곰 4마리를 방사했습니다. 그 중 '반순'이는 끝내 사망했고 '막내'는 적응치 못해 사람들 곁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반돌'이와 '반순'이만 지리산 어디에선가 겨울을 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반달곰하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혹시, 쓸개즙이 아닌가요. 인간의 잔혹성에 의해 몸보신을 향한 탐욕에 의해 이들은 포획되고 사냥되어지며 학대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달곰보존회 회원이기도 한 최철곤(52·지리산국립공원남부관리사무소)씨는 "지난 10년 동안 지리산 일대의 족적과 배설물 등을 조사한 결과 최소한 5마리에서 10마리의 반달곰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면서 "방사한 두 마리는 현재까지 잘 적응하고 있으며 인간의 방해만 없다면 잘 클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특히 "내 생각 같았으면 지리산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입산을 통제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새해여 파이팅하라, 광주에서 온 단전호흡 단원들.
새해여 파이팅하라, 광주에서 온 단전호흡 단원들.오마이뉴스 조호진
노고단 발아래서 마치 산불이 일어난 것처럼 붉은 기운을 보여주던 노고단은 끝내 일출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센 눈보라에 쫓겨 대부분이 하산한 틈을 타 순식간에 먹구름 속에서 붉은 햇살이 아주 잠깐 드러났습니다. 탄성을 내지를 틈도 없이 사라진 햇살 그리고,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지고 거센 눈보라가 다시 몰아쳤습니다. 맨 마지막에 노고단을 등지면서, 설경에 뒤덮인 지리산 자락에 눈을 켜면서 어쩌지 못하고 하산했습니다.

눈사람이 된 청년, 그는 소파개정과 민족자주권 회복을 소망했다.
눈사람이 된 청년, 그는 소파개정과 민족자주권 회복을 소망했다.오마이뉴스 조호진
새 해 첫날, 일출을 보기 위해 지리산을 찾은 사람들은 7000여명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 중 중산리와 백무동을 거쳐 천왕봉을 찾았던 사람들은 멀쩡하게 일출을 보았다고 합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의 거리는 20km, 그것은 숫자적 거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빨라야 1박2일, 늦으면 2박3일 코스인 천왕봉과 노고단의 차이는 이렇듯 컸던 것입니다. 이 변화무쌍한 지리산에서, 혹독한 겨울 지리산에서 삶과 죽음의 투쟁을 남기고 죽어간 사람들, 그들의 겨울 지리산을 생각하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지리산,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끊는다"

눈보라, 눈보라, 그치지 않는 노고단의 눈보라.
눈보라, 눈보라, 그치지 않는 노고단의 눈보라.오마이뉴스 조호진
산에서 내려와 지리산을 곰곰히 생각합니다.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끊는다는 김지하 시인의 노래를 돌이켜 불러봅니다.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는 그 지리산은 좌우대립에 의해 죽음과 죽임의 피가 넘치던 그 지리산을 불러봅니다. 화해와 상생, 이제는 피 끊음도, 분노도 다 잠재우고 흙이 되거나 바람이 된 그 사내들과 여인네들을 생각해봅니다.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김지하 시인의 '지리산' 전문)


국립공원 직원들은 '야호'를 외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국립공원 직원들은 '야호'를 외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오마이뉴스 조호진
'조국'이라는 두 단어가 심상치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매국'이냐 '애국'이냐는 단어로 분명해지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평가하기에는 아직도 이념의 칼날이 무섭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죽음에 씌어진 무거운 죄명을 거두고 순순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조국'과 '애국'이란 단어가 순결하게 씌여질 것입니다.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을 떠난 적이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제목 없는 시 '전문')


눈보라에 묻힌 지리산. 이제 사람이 끊기면 생명은 안도할 것이다.
눈보라에 묻힌 지리산. 이제 사람이 끊기면 생명은 안도할 것이다.오마이뉴스 조호진
산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갔다지요. 맞아죽고, 얼어죽고, 굶어 죽어갔다지요. 무슨 놈의 땅이 이토록 무참한 것인지, 그렇게 죽어 반세기가 흘러갔음에도 몰래 숨죽여 죽음을 추모해야하는지 다시금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흐르지 않는 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흘러서 씻겨져야, 그 누명이 벗겨져야 저 산, 저 지리산이 애통하게 울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넓은 고개에서는 저절로 퍼질러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부침개 한 장 사먹고
남족 아래 골짜기 내려다본다
그 사람 내음이 뭉클 올라온다
가슴 뜨거운 젊음을 이끌었던
그 사람의 내음
쫓기며 부대끼며 외로웠던 사람이
이 등성이를 넘나들어 빗점골
죽음과 맞닥뜨려 쓰러져서
그가 입맞추던 그 풀내음이 올라온다
덕평봉 형제봉 세석고원
벽소령 고개까지
온통 그 사람의 내음 철쭉으로 벙글어
견디고 이울다가
내 이토록 숨막힌 사랑 땅에 떨어짐이
사람은 누구나 다 사라지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떨어어지지
무엇을 그리워하여 쓰러지는 일 아름답
그 사람 가던 길 내음 맡으며
나 또한 가는 길 힘이 붙는다
(이성부 시인의 '벽소령 내음' 전문)


마지막으로 하산하는 국립공원 직원들. 그리고 마지막 하산.
마지막으로 하산하는 국립공원 직원들. 그리고 마지막 하산.오마이뉴스 조호진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벌써 50년이 흘렀는데 어느 죽음인들 베겨 나겠습니까. 붉은 것들은 죄다 모가지가 날라 가는 판에도 붉은 감들은 잘도 열렸고, 봄날이 오면 철쭉은 지천에 피었습니다. 잘한 짓입니다. 꽃이라도 붉어야지요. 그 붉은 열매와 꽃들을 죄다 토벌하기에는 한계가 있지요. 그래서 그 남정네들이 감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걸까? 그 아낙네들의 못 다한 순정이 꽃으로 피어난 걸까?

늦가을 바람녘
비 맞은 감이 지네
남정들 썩은 삭신을 덮고
허옇게 허옇게 지리산 청마루도 흐려지는데

지리산 감나무 맨 윗가지
무신 날이 저리 붉은가
얼어붙은 하늘에 꽉 백혀 진저리치고 있는가

된똥 누다 누다
눈꼬리에 마른 눈물 달은 자식들처럼
감씨 퉤퉤 뱉다 기러기떼
선연한 노을 끝으로 숨어버린 남정들처럼

잘못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
한반도 근대사 속을
사람 지나간 자취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감꽃 폭풍.
(허수경 시인의 '지리산 감나무' 전문)


이질풀은 언제쯤 피어날까.
이질풀은 언제쯤 피어날까.오마이뉴스 조호진
멀쩡한 시인 하나 지리산에 찾아와 미쳤습니다.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 땅이어서, 못 견딜 외로움에 미쳐서 서울을 달아나 지리산에 잠입하더니 오토바이 하나 몰고 다니며 불한당처럼 잘도 삽니다. 어느 날에는 섬진강에서 술을 마시고 어느 날에는 피아골에서 벗들을 만나고 어느 날에는 실상사에서 시를 씁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젊은 시인, 그는 지리산에 취해 도통 벗어날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시가 이렇습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입니다
그대가 칠선계곡의 소슬바람으로 다가오면
나는야 버선발, 버선발의 물봉선

그대가 백무동의 산안개로 내리면
나는야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 산처녀가 되고

실상사의 새벽예불 소리로 오면
졸다 깨어 합장하는 아직 어린 행자승이 됩니다.

하지만 그대가
풍문 속의 포크레인으로 다가오고
소문 속의 레미콘으로 달려오면
나는야 잽싸게 꽃씨를 퍼뜨리며
차라리 동반 자살을 꿈꾸는 독초 아닌 독초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비들이 날아와 잠시 어우르고 가듯이
휘파람이나 불며 그냥 가세요 

행여 그대가
딴 마음을 먹을까봐
댐의 이름으로 올까봐
내가 먼저
손톱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맹세를 합니다 첫눈을 기다립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

여전히 젖은 맨발의 물봉숭아 꽃입니다
(이원규 시인의 '물봉선의 고백' 전문)


지리산 아아, 지리산...
지리산 아아, 지리산...오마이뉴스 조호진
지리산은 참 이상한 산입니다. 멀쩡하게 사는 사람들을 지리산으로 불러모아 술에 취하게 하고, 눈물과 아픔에 취하게 합니다. 가지 않으면 몸살을 앓는 사람들은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실성한 듯 쏘다니면서 잔을 붓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하고, 산에 모여 공부하기도 합니다. 서울로 발령 난 이 시인도 끄덕하면 지리산으로 달려옵니다. 그 비싼 휘발유 값 길에 뿌리며 와서는 그렁그렁한 순한 눈빛으로 눈물 같은 노래를 부르고 다시 서울 길로 향합니다. 지리산 아, 지리산...

지리산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는
구례에 와서 밤하늘 바라보면
구례에는 별이 두 개 더 있다

마을 가까이 내려서고 싶은 모양으로
시암재와 노고단에서 빛나는 두 별

그 하나의 별빛은
산으로 쫓겨가야 했던 사람들의 맑은
또 하나의 별빛은
돌아오지 못하고 잠든 사람들의 깊은

그 두 별을 가슴에 품어서일까,

구례사람들 눈빛은
유난히 맑고 깊은 그 별빛을 닮아있다
(김인호 시인의 '구례사람들 눈빛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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