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함께 보낸 새해 첫 날

등록 2003.01.02 09:40수정 2003.01.0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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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을 시작하는 새해 첫날 아침, 우리 가족은 아침부터 한바탕 부지런을 떨어댔습니다. 멀리 떨어져 살고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서였죠. 새해를 앞두고 새해 첫날 무엇을 할까 며칠간 고민을 하던 중 마침 부모님과 통화를 하게 됐고, 통화 도중 전화기 저 편의 부모님 눈치가 자식 내외와 어린 손녀딸을 퍽이나 보고 싶어하시는 듯 하기에 선뜻 새해 첫날을 부모님과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 까닭입니다.


새해 첫날 아침, 먼 길을 떠나기 위해 이것저것 바쁘게 준비를 하는 한편 할아버지 할머니라든가 다른 누군가가 또 몇 살이냐고 나이를 물어올 것에 대비해 내가 딸아이에게 “해가 바뀌었으므로 이제부터 너는 다섯 살이 아닌 여섯 살!”이라고 설명을 해주자, 유치원 상급반 언니들을 떠올린 듯 딸아이는 “그럼 이제 나도 언니예요?” 하고 반문하며 예상했던대로 반가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딸아이는 새해 첫날 아침을 맞아 자신도 언니가 됐다는 생각에 반갑고 기쁘게 나이 한 살을 더했고, 그 곁에서 “그러면 엄마는 이제 몇 살이에요?” 하고 묻는 딸아이의 질문과 맞닥뜨린 아내는 서른 몇 살이라는 자신의 나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싫은 듯 짐짓 열 살이나 어린 거짓 나이를 천연덕스럽게 둘러댔으며, 나는 그저 담담하게 나이 한 살을 더 먹은 채 함께 부모님을 만나뵙기 위한 길에 올랐습니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넘나들며 몇 시간을 달려 마침내 부모님 댁 앞에 도착하자 언제나처럼 우리 가족이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부모님이 뛰쳐 나오셨습니다. 평소 차량 진입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막다른 길 한 켠에 집이 위치해 있다 보니 우리 가족이 간다는 소식 끝이면 의례 바깥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가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뛰쳐 나오시곤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이!”, “어이구, 우리 강아지 왔어?” 어쩌구 하며 서로가 서로를 반갑게 부르고 맞는 시간들을 거쳐 방 안에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우리 가족은 준비해 간 비장의 선물을 펼쳐보이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새해 들어 여섯 살을 맞은 딸아이가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이는 정식(?) 세배가 바로 그것이었죠. 그동안 딸아이는 TV 사극 등을 통해 엉성하게나마 절하는 방법을 배워두긴 했지만, 제대로 세배를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터였죠.

그런데 이번에 새해를 맞아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뵈러 간다고 하자 무슨 까닭인지 딸아이는 느닷없이 “그럼 ‘마마’도 하는 거예요?” 하고 물으며 TV 사극을 통해 배우고 익힌 용어를 빌어 세배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나타냈고, 이에 아내와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예쁘게 세배를 드리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이 좋아하실 것!”이라고 제대로 된 세배 방법을 알려주는 한편 그런 딸아이를 격려해 주었었는데, 마침내 그 비장의 선물을 펼쳐보일 차례가 된 것이었습니다.


다소 서툰 발음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인사말을 곁들여 딸아이가 꾸벅 세배를 올리자 부모님은 예상했던대로 “아이구, 우리 강아지가 이제 정말 다 컸네!” 어쩌구 하며 크게 기뻐하셨고, 대뜸 쌈지주머니를 뒤적거려 서슬 퍼런 만원짜리 한 장을 딸아이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아직 돈을 잘 모르는 딸아이는 그저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뻐하시며 자신에게 뭔가를 주는 것만 좋아 헤헤거리며 있었구요.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그동안 새롭게 배운 노래와 춤들이며 최근 급진전을 보이고 있는 한글 읽기 실력 등을 선보이는 한편, 가족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 받으며 우리는 그렇게 새해 첫날을 보냈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에게조차 조금의 신세도 지지 않으려 드는 부모님 성격을 알기에 물질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드리려 드는 것보다는 될 수 있는한 자주 찾아뵙고, 손녀딸의 재롱이라도 보여드리며 그저 조금이나마 마음을 따뜻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게 최선이다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다지며…


그렇게 새해 첫날을 보내고 부모님께 아쉬운 작별인사를 드린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와 나는 딸아이가 내던진 “그런데 아빠, 할아버지가 준 내 돈은 왜 안줘요?”, “그런데 아빠, 엄마 아빠는 왜 맨날 내 돈 안줘요?” 하는 뜻밖의 항의 앞에 웃음이 터져나와 그만 달리고 있던 차를 멈춰 세울뻔 했습니다.

아직은 돈이라는 것을 잘 몰라 손에 쥐고 한창 놀다보면 어딘가에 팽개쳐 버리기 일쑤인 게 딸아이인지라 간혹 누군가 슬그머니 돈을 쥐어주기라도 하는 날이면 ‘보관해주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받아두고 다시 받아두곤 했던 것을, 어차피 제 관심 밖의 대상이므로 금방 잊고 말았을 거라 짐작했던 아내나 내 생각과는 달리 아마도 딸아이는 잘도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소 집요한 구석이 있는 딸아이의 그 같은 항의를 아내와 나는 “집에 가서 돌려주겠다”며 일단 무마시키긴 했지만, 일순간 그동안 횡령해 먹은 적지않은 딸아이의 돈을 떠올리며 얼마간 미안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마음은 딸아이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나중에 제 손으로 관리하게 해줘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며 들고 있다가 써버리고 또 써버리곤 하던 안좋은 습관을 이제야말로 정말 고쳐야겠단 생각도 들었구요.

어쨌거나 이제 막 시작된 올 한 해도 아래 위 안팎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이것저것 사람 할 도리를 제대로 다 하려 애쓰며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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