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꿀'에 관한 진실 혹은 거짓

태국 여행

등록 2003.01.07 23:53수정 2003.01.0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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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방콕행 비행기를 탔다. 97년 신혼 여행 이후 첫 해외여행이다. 태국에 관해 아는 거라고는 얼마 전 그곳에 다녀온 친구에게서 들은 단편적인 얘기들이 전부였다. 사실 그 친구 얘기에 솔깃해서 즉흥적으로 그 곳을 결정한 거였다.


'다음엔 꼭 패키지가 아닌 자유 여행을 하자' 혹은 '여행을 가기 전에 공부를 많이 해놓자' 등등의 얘기들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여행 5일 전에 여권 신청하고 여행사 하나를 겨우 찾아 예약을 했으니. 남은 날들은 독감 걸린 두 살 짜리 아기 돌보면서, 여러 가지 일 처리하느라 제 정신이 아니었다.

'방콕, 파타야' 4박 5일, 정확히 49만9천원짜리 여행(가이드 팁 제외)이라 옵션 관광과 쇼핑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상황에 처하고 보니 화가 치밀었다. 5년 전의 하와이 신혼 여행 때와 똑같았다. 태국 물가가 한국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는데 태국의 옵션 관광은 한국 물가에 맞춰져 있는 듯했다.

언제 다시 오랴 싶어 있는 돈을 다 털어서라도 모두 선택하고 싶었지만, 최소한 3∼4배의 '바가지 요금'이라는 걸 뻔히 아는 상황에서 결정을 쉽게 내릴 수가 없었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항공료와 호텔 숙박료 등을 어림잡아 계산해본 결과, 가이드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어쩌겠냐 하면서 선택한 것이 비교적 저렴한 '알카쟈쇼'(30불)와 '파라세일링'(1회 10불)이었다.

사실 태국 전통 지압도 꼭 받고 싶었는데 무려 40불(2시간)! 남편은 중국에서 받아봤다니까 나 혼자만 한다 해도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는데, 주변을 산책하다가 호텔(가든 비치 리조트) 부속 쇼핑 상가에서 마사지 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별로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둘이 15불(1시간)! 비로소 태국 전통 지압에 대한 '한'을 풀 수 있었다.

적어도 셋째 날까지는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다. 남편과의 언쟁은 문제의 '양귀비 꿀'에서 비롯되었다. 친구가 꿀과 로얄제리는 꼭 사오라는 언질을 주었고, 가이드는 여행 틈틈이 태국의 꿀과 로얄제리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정보'를 주입했던 터라 값비싼 로얄제리는 몰라도 꿀은 많이 사고 싶었다.


1kg 1개당 3만원, 6개들이 한 박스 사면 하나를 더 준다? 그러면 개당 2만 5천 원. 또 여기 아니면 살 수 없단다. 공항 면세점 가봤자 없다고, 출국하면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사라고 부녀회에서 나왔다는 여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토종꿀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태국 가격으로 2배 비싸게 판다해도 손해일 것 같지 않았다. 돈 많은 이모는 작은 생수병(500ml)에 담긴 토종꿀 하나에 5만원 주고 샀다는데... 당장 집에 가면 한두 달에 한 번은 꿀 사야 되고, 우리 처지에 토종꿀은 구경하기도 힘든데... 게다가 우리 주머니 사정을 아는지, 신용 카드는 물론 외상까지 된다고 하니 남편에게 한 박스를 사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 여자의 약장수 같은 입담이 전형적인 '사기꾼' 같다며 진즉 기분 상해 있는 터였다.


지금까지는 뭐든지 항상 먼저 나서서 사자던 남편이 뭘 사자는 내 제안에 처음으로 반대하였다. 사고 싶으면 두세 개만 사라는 것이었다. 호주 면세점에서 사온 꿀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고. 그렇다고 호주로 꿀 사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마지막 날인데다 자유시간이라곤 저녁 식사 후가 다인데 어디 가서 꿀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나는 더 초조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3만원에 산 꿀이 다른 곳에서 1만원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내가 산호섬에서 2달러에 흥정해서 산 손뜨개 모자 종류를 일행 중 하나가 7달러에 사는 것을 보면서 '바가지'라는 심증은 더욱 굳혀졌다. 게다가 남편은 자기 말보다 처음 보는 여자의 말을 더 믿는다며 '펭'하고 돌아서는데, "안 사면 될 것 아니냐"고 얼떨결에 화를 더 돋구었다. 그러고도 아쉬움이 남아 결국 2개를 샀다.

그 이후론 온통 꿀 생각뿐이었다. 남은 일정 동안 꿀에 대한 남편과의 언쟁은 간간이 지속되었다. 가까운 자리에서 그 언쟁을 듣게 된 내 또래의 아줌마도 꿀을 한 박스나 산 것에 대해 영 불안해했다. 결국 다른 곳에서 꿀을 찾아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시 한 차례 꿀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남편은 내가 한 박스의 꿀을 사자고 한 것이 지금까지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비이성적인' 행동이라고 공격했고, 나는 상황에 따라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양귀비 꿀'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자 여행 뒤의 피로도 잊은 채 틈만 나면 인터넷 검색을 했다. http://www.aq.co.kr/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태국은 가짜의 '천국'이며 교민회에서 파는 것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거기에 실린 한 여행후기에 의하면 문제의 꿀에 대한 의문을 품고 백화점 등을 여러 군데 다녀보았지만 그것을 결코 찾을 수 없었다는 내용도 있다. 현지인 가이드조차 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고, 그 가이드가 여러 군데 전화를 걸어 꿀 가격을 수소문해본 결과 0.7kg당 1만 5천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태국에도 가짜 꿀이 있다는 것이었다.

제 값(팁 포함 75만원) 다 줘서 쇼핑이나 바가지 옵션관광을 강요당하지 않았다는 친구에게도 물어보았다. 자기네 가이드는 두세 개만 사라고 귀띔했다고 한다. 먹어보고 좋으면 전화하라고. 얼마든지 보내주겠다고. 한국인 가이드와 부녀회 여자의 말이 아직도 귀에서 맴도는 듯하다. "태국에는 가짜 꿀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사시사철 꽃이 피기 때문에 양봉이 필요 없는 나라다, 설탕 값이 꿀 값보다 비싸다" "근데 꿀 값이 왜 그렇게 비싸요? 가서 따 오기만 하면 되는 걸."

패키지 여행에선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교민 자녀를 위한 학교를 짓는다는 대의 명분이면 '바가지' 가격도 모두 용서되는가보다. 그렇지 않아도 교민회에서 운영하는 가게는 독점이나 다름없는데 좀 합리적인 가격으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남편의 항변이 더욱 공감이 간다.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비교적 많았던 남편 말에 의하면 어느 나라를 가나 그런 행태가 똑같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쯧쯧….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가 결국은 자멸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지…."

양귀비 꿀에 대한 우리 부부의 언쟁과 의문은 이 정도로 끝내려고 한다. 남편의 강권에 꿀 한 병은 동생네 주고 남은 건 달랑 한 병, 맛과 향이 괜찮다. 진짜라고 믿으면서 안타깝고도 아쉬운 마음으로 아껴가며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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