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을 지적하는 자’ 강대진

등록 2003.01.15 14:12수정 2003.01.2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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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있어야 할 것이 빠져있는 듯한 우리의 상황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전 읽기’ - 그것이 서양의 신화, 문학, 철학에 관련된 것이라도 좋고, 동양의 고전에 관련된 것이라도 좋다 - 에 대한 관심이 우후죽순 격으로 자라나는 것은 이 땅의 척박한 인문학적 풍토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일 수 있다.

더구나 ‘인문학의 죽음’이 몰고 올 사태가 예견되는, 그래서 오랜 가뭄에 모낼 땅마저 농부의 손바닥처럼 갈라지기 시작한 저반(底盤)에, 비록 멀리지만 잔뜩 수증기를 머금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징조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큰 서점, 아니 도회지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있는 서양식 쇼핑몰이라도 가보라. 책을 파는 곳이면 아이들이 몰려 앉아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련된 만화책을 펴놓고 읽는 풍경을 쉽게 발견하곤 한다.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우리의 아이들이 저렇게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니, 그것도 적지 않은 무게를 가진 내용을 담고 있는 서양 고전, 신화에 관련된 책들이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 중에서도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련된 책들이 하루가 다르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어떤 책을 선정해서 읽어야 서양 사상의 토대가 되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어떤 문제점이 있어 보인다.

아무리 양보해서 들어준다고 해도 이윤기가 서양 신화의 전문가가 되고, 이문열이 호메로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얘기한다는 것은 잘못되었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딱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바르게 지적될 사항이겠지만, 이 잘못된 현상의 상당부분은 어쩌면 고전을 공부하는 이 땅의 학자들 자신이 짊어질 몫인지도 모른다. 이 잘못된 현상을 어떤 식으로 따져 보고, 이를 통하여 그 점을 올바르게 지적하는 일은 이 땅의 고전학자들의 책임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많이 책방에 쌓여 있는 그쪽 방면의 책들이 서양인에 의하여 쓰였고, 이 땅에서 출판된 것은 한낱 번역서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땅에는 서양 고전에 관한 전문가가 그렇게도 없다는 말인가? 이것은 혹시 정치적 식민지를 넘어 문화적 식민지까지 보여주는 자랑스럽지 못한 현상은 아닌가?

여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련된 고전문학, 신화, 미술, 건축 등에 관련된 번역서들을 꼼꼼히 검토하여 어떤 점에서 잘못된 번역인지를 지적하고 나선 고전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서울대 고전학 합동과정의 강대진 박사이다. 호메로스의 전공자인 그는 서평자로서의 뛰어난 안목과 언어학적 능력을 가진 젊은 학자이다.


그의 뛰어난 서평자로서의 참모습은 서울대 고전학 합동 과정의 서평란(http://plaza.snu.ac.kr/~hermes/)에 들어가 보면 알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름에 대한 표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깊은 내용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어떤 점에서 잘못된 번역을 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20여 저작에 이르는 서양 고전과 신화에 대한 번역서들을 일일이 짚어가면서 번역서를 해부하고, 때로는 원 저자의 무지를 지적하면서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해설해 주고 있다. 그의 친절한 번역서의 수정만을 읽어도 서양 신화, 예술, 조각에 관련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획득할 수 친절함을 베풀고 있다.


강 박사의 번역서에 대한 잔인한 서평(?)은 번역자로 하여금 수치심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번역자의 노고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번역자가 상처를 입지 않도록 번역을 극구 칭찬하고 나서 정중히 오역을 지적하는 일은 힘들다.

대개의 번역가들은 자신의 오역을 지적당하는 것을 감사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서평자로서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번역가라면 늘 상처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오역을 지적당한 번역가의 낭패, 원한, 이번에는 지적한 상대의 오류를 잡아내서 앙갚음하고 싶다는 유혹, 그런 감정은 자기가 하는 일에 무관심한 저급한 노동자, 날림으로 번역을 하는 사람은 좀처럼 느끼기 어렵다’ (<번역사 산책>, 이희재 옮김, 궁리 182-183쪽)

강 박사의 깐깐한 지적들이 역자들의 마음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강 박사 자신은 ‘자기네 하는 일에 무관심한 저급한 노동자, 날림으로 번역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잔인한 비평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번역사 산책

쓰지 유미 지음, 이희재 옮김,
궁리, 2001


고전의 유혹 1 - 원전 번역자의 해제로 읽는 서양 고전의 모든 것

백종현 외 지음,
아카넷,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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