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귤에 대한 변명

부족함이 주는 풍요로움

등록 2003.01.19 21:19수정 2003.01.2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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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2년 11월 21일 북제주군 구좌읍 귤밭에서

2002년 11월 21일 북제주군 구좌읍 귤밭에서 ⓒ 김민수

제주에는 사먹을 수 없는 귤이 있습니다. 사먹을 수 없는 대신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귤인데 파찌(?)라고 이곳 사람들은 말합니다. 상품가치가 없는 작은 귤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이들의 작은 손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아서 까면 아이들의 작은 입에 쏙 들어갈 정도입니다. 맛은 여느 귤보다 좋지만 작아서 상품으로 내놓지는 못합니다.


올해는 귤값이 폭락을 해서인지 밀감밭이 아름다워보이기보다는 슬퍼보입니다. 20kg을 출하하면 고작 1000원이 남는다고 하니 차라리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이 정도면 조그만 트럭 한 차를 실고 가면 5-6만원도 안 남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도 열심히들 거둡니다. 그래야 합니다. 설령 손해가 나더라도 열심히 거두어야 몸뚱이만 가지고 일당으로 살아가는 고단한 사람들이 희망을 볼 수 있으니까요. 농어촌 지역에 젊은이들이 남아있을 수 없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수입이 적건 많건간에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는 아이들과 무공해 귤밭에 가서 귤을 따왔습니다. 두어 시간 따니 컨테이너 다섯 개에 가득합니다. 농약을 치지 않은 귤은 모양새가 예쁘지 않습니다. 거칠하고, 맛도 조금 떨어집니다. 그러나 농약을 친 귤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옛날 귤이 귀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귤껍질을 햇살에 잘 말려서 연탄불에 은근히 끓여서 귤차를 끓여먹기도 했지요. 버리는 것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농약때문에 귤차를 끓여 먹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귤차를 마셔본 일이 없습니다.

옛 향수, 귤을 따면서 지인들에게 보낼 때 '맛은 떨어지지만 농약을 치지 않은 것이므로 귤차를 끓여드시면 더 좋습니다'하고 짤막한 편지를 써서 못생긴 귤에 대한 변명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니 맛보다는 무공해를 좋아하는 분들의 얼굴이 떠올라 흐믓합니다.


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귤나무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모든 자연물은 그 일상에 우리 사람들이 꼭 간직하고 배워야할 지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귤나무도 그렇죠.

귤은 뿌리를 깊게 뻗지 않고 넓게 뻗는다고 합니다. 제주는 돌이 많기 때문에 깊게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귤이 단맛을 유지하려면 너무 많은 물을 섭취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돌이 많아 비가 와도 물이 잘 빠지는 제주가 귤을 키우기 좋은 토양조건이 되는 것이죠.


물이 금방 빠져버리니 뿌리를 넓게 하지 않으면, 잔뿌리가 많지 않으면 비가 왔을 때 필요한 만큼의 수분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귤밭을 만들기 전에 땅을 갈고 자갈을 깔아준다고 하는데 그런 밭에서 나온 귤이 맛도 좋다고 합니다. 물이 쑥쑥 잘 빠지게 때문이죠.

부족함 속에 단맛의 비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부족함 없는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갈증, 목마름은 그 사람의 삶을 더욱 진하게 만들고, 맛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죠. 필요한 모든 것을 아이들이 요구하기도 전에 채워주게 되면 그 아이들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제 수확을 한 귤은 농약을 치지 않아 상품으로 내놓기는 힘든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매끈하지 않고 군데군데 검은 점들이 박혀 있습니다. 겉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시대에서 그런 귤이 상품으로 팔릴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귤이 건강에 더 좋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못생긴 귤이 농약을 흠뻑 먹고 자란 귤들보다, 코팅처리된 귤들보다 못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알맹이뿐만 아니라 겉살까지도 은은하게 우려 귤차로 마실 수 있습니다.

농약을 친 귤, 코팅처리된 귤의 껍질은 알맹이를 내주면 이내 쓰레기통에 들어가거나 버려집니다. 그러나 못생긴 귤은 알맹이를 내준 후에도 집안에 남아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이내 은은한 불에 다려져 몸안에 모셔지고, 몸안에 모셔짐으로 몸에 침투하려는 나쁜 바이러스들을 막아줍니다. 성형미인이 판을 치는 시대,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귤값이 쌉니다. 그러다 보니 지천에 널린 것이 귤입니다. 지천에 널려 있으니 좋은 것을 골라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지은 사람도, 농장에서 일당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도. 작년에는 당근이 싸서 당근을 수확한 밭에 가서 당근을 실컷 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당근이 제값을 받으니 당근밭에 가도 당근 구경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 귤값이 싸니 맛있는 것, 좋은 것이라도 부담없이 실컷 맛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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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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