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출두'라 해야 하나

[주장]지나친 낱말 중심 방송언어 문화성 해쳐

등록 2003.01.23 06:32수정 2003.01.2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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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든, 시사 프로든, 뉴스든 TV방송을 대하고 있노라면 출연자들의 우리 말 발음에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많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써온 바른 말들이 다르게 발음되는 것들이 있어 왜 그러는지 의아스러운 것이다.

요즘에 방영되고 있는 어느 방송국의 코믹 사극에서는 '암행어사 출두여!' 하고 소리친다. 대화에서도 '암행어사가 출두한다고?' 하는 등 '출두'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발음한다. 그렇게 발음하는 것은 일반 토크쇼를 통해서도 접하기 어렵지 않다. 최근에 와서 생경하게 벌어지는 현상들이다.


아마도 나갈 출, 길 도, '출도(出道)'로서는 암행어사가 나타나신다는 의미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낱말 중심에 얽매어 자의적으로 해석해 붙인 결과가 아닌가 싶다. 출도가 아닌 '출두(出頭)'는 일반적으로 소환 대상자에게 붙여져 왔다.

요즘으로 말하면 '수천억원의 유용혐의를 받고있는 모 그룹의 오너가 조만간 검찰에 출두할 예정'이라는 식의 내용에 쓰여지는 용어에 다름 아니다. 옛 어감으로 친다해도 '고을 원님의 호출이 있어 신문을 받기 위해 현청 동헌에 출두했다'는 사정이 아니고서야 납득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춘향전 등 고대소설 풀이에서는 출두라 하지 않고 '출또'라 했다. '암행어사 출또야! 하고 외치면 인근 백성들까지도 따라 소리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분하고 억울하게 짓눌렸던 백성들에게 있어 암행어사 출도는 곧 자기들의 승리였다.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된 날의 승리감으로 포효하며 나부끼는 깃발의 언어로 되어버린 지 오래다. 나이가 있는 독자들은 출또라는 발음에 더 익숙해 있을 것이라 본다. 판소리 춘향전 등에서도 '출또'라 한다.

작고한 역사소설가 박종화씨는 어떤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출또>한다고 하는 것은 길을 나선다는 뜻'이다 라고. 알다시피 출또는 '출도'의 된 말이며 이 경우 암행어사께서 나가신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나갑신다'는 목적격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라기보다 목적권으로 들어온다는 옛말 특유의 반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풀이였다.

억압받은 백성에게서 나타나는 간절한 소망의 표현인 것이다. 그같은 반어법은 우리 옛말의 매력으로 적잖이 쓰여지고 있다. 암행어사가 나타나심은 탐관오리를 정치하는데 주된 뜻이 있었지만 그 외에 불의와 비리여 물렀거라, 훠이 물렀거라 하는 엄포를 뿌림으로써 불의나 비리를 사전에 예방하고자 하는 홍보 효과를 노리기도 했던 것이다.


설령 이 경우 딱히 '출두'라야 맞는 말이라고 고집할지라도 조상들과 함께 오래 전부터 써온 말인 '출또'를 마치 크게 잘못된 표기인 양 굳이 교정 사용해야 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랬다고요---아빠가 오셨다고요'는 일반적으로 '---그랬다구요---아빠가 오셨다구요'라고 하는 등 '고'를 '구'로 말하고 있지 않던가.

방송언어에서 거부감을 자아내게 하는 말은 그 외에도 너무 많다. 장돌뱅이를 '장똘뱅이'라 발음하지 않고 글자대로 '장돌뱅이,라 하는 것도 그 예이다. 이 장 저 장을 매일 더터 돌아다니는 떠돌이 장꾼의 신세가 처량하고 따분하여 스스로 낮춘 데서 생겨난 칭호이다. 이것을 부드럽고 고급스레 호칭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사라진다. 이와 같은 지나친 글자 중심의 발음은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청주 지방에 사는 어느 친구의 말을 빌려 보겠다. 그가 시내버스를 탔는데 녹음된 안내 멘트를 듣다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고 한다. '다음 정거장은 <산업인려 관리공단>입니다' 또는 '다음은 수고우동(수곡동)입니다' 하고 낭랑하고 또렷하게 발음하더라는 것이다.

'인력관리' 할때 '력'자 다음으로 이어지는 '관'자가 '꽌'으로 발음되거나 '수곡동'이라고 할때 '곡'자 다음으로 불려지는 '동'이 '똥'으로 발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겠느냐고 시내버스 관리공단 관계자가 그의 질의에 아무렇지도 않게 답변하고 있더란다.

그렇다고 '력'자에서 아예 'ㄱ'을 떼 내버리다니 어마어마한 망발이 아닐 수 없다. 그 친구는 덧붙여 말했다. 심지어 그 지방 방송국의 어느 여자 아나운서는 지금도 충청북도를 '추저부도'에 가깝게 발음하고 있단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같은 실태는 비단 충청지역 만의 예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 말 관련 당무자들은 글자 중심의 발음 체계로 유도하는 방안과 강음을 배제하고 약음 중심의 발음을 정착시키자는 규정을 두고 있어 보인다. 아무래도 그것은 적절하고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글자 중심으로 가든 약음체계로 가든 말을 다듬는데는 필요한 현장 답사(이를테면 방언으로부터 생성된 언어를 위해)를 거치면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신중하고 면밀하게 검토한 뒤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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