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오른쪽)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조선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2000년 4월 8일 중국 상하이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결정된 것은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부위원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특사회담에서가 아니라 국정원과 북 아태측이 세 차례에 걸쳐 접촉했던 비밀회담에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4월 8일 이전에 이미 국정원과 아태측이 물밑에서 진행한 비밀접촉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고, 나중에 공개된 남북 특사회담은 양측 실무자들이 작성해 놓은 합의서를 박지원-송호경 두 사람이 서명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 이전인 3월 9일 국정원의 김보현 대북전략국장(현 3차장), 서영교 단장(현 대북전략국장)과 아태의 송호경 부위원장, 황철·권민 참사 등은 싱가포르에서 세 번에 걸쳐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들이 바로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4·8 베이징 특사회담의 합의서 서명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숨은 그림'들인 것이다.
그러나 비밀접촉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로동신문>(3월6일)은 '모략군이 끼여들 자리는 없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화를 상대방에 대한 모략공간으로 이용하려는 괴뢰정보원 패거리들의 개입부터 일체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국정원의 개입을 비난했다. 국정원의 북한정보 분석업무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3월부터 우리측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공식 서명한 4월 8일까지 북한측은 국정원의 뭍밑 접촉(개입)과 관련해서 중앙방송을 통해 세 번 비방했다".
북측 "정상회담 접촉에 국정원 제외해달라"
북한은 2000년 3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된 제안에서 "곧바로 정상회담 교섭을 시작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런데 "단 교섭에는 국가정보원 관계자를 제외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북측이 그때까지 남북 비밀회담에 나온 국가정보원이 아닌 다른 정부 당국자와 만나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교섭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궁리 끝에 박지원 장관을 특사로 임명해 3월 17일 상하이 비밀회담에 내보낸 것은 이런 양측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이처럼 북측이 '얼굴 없는 국정원 간부' 대신에 김대통령 특사와의 '합의'를 원한 것은, 북측으로서는 '장사꾼'에 불과한 현대와의 이른바 대북 7대사업 계약에 대한 남측 정부의 담보(보증)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대목은 <내일신문>(2월7일자)이 정주영 회장과 절친하게 지냈던 한 경제계 원로의 말을 인용해 "북측에서 최초 요구한 것은 금액이 10억 달러였으나 정몽헌 회장이 북한 개발의 대가로 5억달러를 주기로 최종 합의하고 계약서를 체결한 것은 2000년 3월17일이며 이 자리에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있었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 경제계 원로는 "계약서를 체결하는 자리에 북측에서는 송호경(당시 아태 부위원장) 황철(아태 실장)이, 현대에선 정몽헌 회장, 박지원 장관 등이 참석했다고 정 명예회장이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3월 17일 최종 합의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MBC가 2월 8일 9시 뉴스데스크에서 단독보도한 대로 "2000년 5월 현대와 북한이 사회간접자본 사업권에 대해 잠정 합의했지만 발표하지 않은 것은 일본 등 장래 북한 투자할 국가와의 외교마찰을 우려한 북한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밝힌 김운규 현대아산 사장의 발언이 더 정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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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장관의 3월 17일 상하이 행적
그러나 결국 박지원 장관은 3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상하이 비밀접촉에도 참석하고 정몽헌-송호경 비밀회담에도 '옵저버'의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북한 개발사업과 정상회담이 '동시 패키지'로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 정몽헌 회장이 2000년 4월 8일 당시 박지원 장관이 베이징에서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을 만나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기 하루 전에 베이징에 갔다가 10일 귀국한 바 있어 이 때도 자리를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던 이익치씨도 4월 7일 베이징을 방문했다 9일 귀국했다. 이런 사실들은 '동시 패키지' 진행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국정원의 전직 간부는"2000년 3월17일 상하이 비밀접촉 때는 이미 북한측이 정상회담에 대한 원칙적 동의 카드를 들고 나온 시점이었다"면서 정상회담 대가 의혹을 일축했다. 그는 "당시 현대그룹은 금강산관광 비용이란 명목으로 매달 800만 달러를 꼬박꼬박 북한 계좌에 입금시켰다"면서 "따라서 남북이 결혼(정상회담)에 앞서 연애단계에 해당하는 98∼99년 사이에 '데이트자금'으로 현대그룹의 돈줄을 활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5억 달러는 본질적으로 현대의 7대사업 독점 계약 대가금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전직 간부는 "물론 현대가 98년말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으로 대북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남북관계 진전은 사업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기에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현대가 대북 사업권을 따내는 데 적극 지원했다"면서도 오히려 어떤 점에는 현대가 북측에 사업을 따내는 대가로 거액을 약속하는 등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견제를 했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5억 달러는 사업권 획득 '리베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