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꾼과 계약, 국정원담보 못믿겠다"
북한 요구에 박지원 특사 긴급 파견

[심층해설] 박지원, 현대-아태 계약자리에 왜 동석했나

등록 2003.02.09 23:11수정 2003.02.1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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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17일 당시 박지원 장관(현 대통령비서실장)은 왜 현대-北 아태 간의 계약 자리에 동석했나.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오래 전부터 북한과 무역을 해온 신일본(新日本)산업의 요시다 다케시(吉田猛) 사장이 수차례 평양을 다녀온 끝에 성사된 98년 2월 15일의 '베이징 비밀접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최초 비밀접촉의 북측 대표는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 남측 대표는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의 경영권 이양을 둘러싼 이른바 '왕자의 난' 끝에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북한과의 교섭 책임자는 몽헌으로 한다"는 위임을 받은 정몽헌 회장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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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2월에 시작된 현대-아태의 첫 비밀접촉

고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과 정몽헌(鄭夢憲) 회장이 북한 김정일 당총비서와 함께 98년 10월 30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과 정몽헌(鄭夢憲) 회장이 북한 김정일 당총비서와 함께 98년 10월 30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이 비밀교섭을 계기로 현대측은 끈질기게 북한을 설득해 마침내 98년 6월 16일 '소떼몰이 방북'이라는 역사적인 '깜짝쇼'를 연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이벤트의 이면에는 현대의 대북접촉을 하나하나 코치하고 지원한 국정원 대북전략국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전략적 지원'이 있었다. 물론 과거와 다른 국정원의 이런 대북전략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북한측이 판문점 통과를 조건으로 소떼 뿐만 아니라 소떼를 실은 트럭까지 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이 역사적인 이벤트는 난항을 겪었다. 특히 군에서는 트럭은 군용으로 전용되기 때문에 기증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과거부터 대공산권 수출통제체제를 유지해온 미국측이 반대할 것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중국 동북부에서 발생한 광우병을 계기로 "북한도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국정원의 정보보고를 근거로 북에 두고 오는 쪽으로 해결되었다.

98년 6월의 소몰이 방북에 이은 그해 가을 정주영-정몽헌 부자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을 계기로 국정원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국정원의 입장에서 현대의 대북사업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거대한 '편승공작'이었던 것이다. 즉 1998년 11월말부터 서울의 국정원 대북전략국과 평양의 노동당 통일전선부가 17개월 간의 물밑 접촉 끝에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남북 정상회담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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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북사업은 정상회담 위한 거대한 '편승공작'

이 역사적인 2000년 6·15 공동선언의 '숨은그림 찾기'는 그해 4월 10일 남과 북이 동시에 발표한 정상회담 개최 합의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과 북은 이날 박지원 당시 문화부장관과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이 4월8일 중국 베이징에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서명한 남북합의서를 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역사적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특사회담에서 양측이 합의서를 서명하고 교환하는 장면의 사진에 배석자의 얼굴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두 특사만 나온 점이다.

박지원(오른쪽)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조선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2000년 4월 8일 중국 상하이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박지원(오른쪽)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조선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2000년 4월 8일 중국 상하이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결정된 것은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부위원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특사회담에서가 아니라 국정원과 북 아태측이 세 차례에 걸쳐 접촉했던 비밀회담에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4월 8일 이전에 이미 국정원과 아태측이 물밑에서 진행한 비밀접촉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고, 나중에 공개된 남북 특사회담은 양측 실무자들이 작성해 놓은 합의서를 박지원-송호경 두 사람이 서명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 이전인 3월 9일 국정원의 김보현 대북전략국장(현 3차장), 서영교 단장(현 대북전략국장)과 아태의 송호경 부위원장, 황철·권민 참사 등은 싱가포르에서 세 번에 걸쳐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들이 바로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4·8 베이징 특사회담의 합의서 서명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숨은 그림'들인 것이다.

그러나 비밀접촉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로동신문>(3월6일)은 '모략군이 끼여들 자리는 없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화를 상대방에 대한 모략공간으로 이용하려는 괴뢰정보원 패거리들의 개입부터 일체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국정원의 개입을 비난했다. 국정원의 북한정보 분석업무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3월부터 우리측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공식 서명한 4월 8일까지 북한측은 국정원의 뭍밑 접촉(개입)과 관련해서 중앙방송을 통해 세 번 비방했다".

북측 "정상회담 접촉에 국정원 제외해달라"

북한은 2000년 3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된 제안에서 "곧바로 정상회담 교섭을 시작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런데 "단 교섭에는 국가정보원 관계자를 제외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북측이 그때까지 남북 비밀회담에 나온 국가정보원이 아닌 다른 정부 당국자와 만나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교섭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궁리 끝에 박지원 장관을 특사로 임명해 3월 17일 상하이 비밀회담에 내보낸 것은 이런 양측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이처럼 북측이 '얼굴 없는 국정원 간부' 대신에 김대통령 특사와의 '합의'를 원한 것은, 북측으로서는 '장사꾼'에 불과한 현대와의 이른바 대북 7대사업 계약에 대한 남측 정부의 담보(보증)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대목은 <내일신문>(2월7일자)이 정주영 회장과 절친하게 지냈던 한 경제계 원로의 말을 인용해 "북측에서 최초 요구한 것은 금액이 10억 달러였으나 정몽헌 회장이 북한 개발의 대가로 5억달러를 주기로 최종 합의하고 계약서를 체결한 것은 2000년 3월17일이며 이 자리에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있었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 경제계 원로는 "계약서를 체결하는 자리에 북측에서는 송호경(당시 아태 부위원장) 황철(아태 실장)이, 현대에선 정몽헌 회장, 박지원 장관 등이 참석했다고 정 명예회장이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3월 17일 최종 합의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MBC가 2월 8일 9시 뉴스데스크에서 단독보도한 대로 "2000년 5월 현대와 북한이 사회간접자본 사업권에 대해 잠정 합의했지만 발표하지 않은 것은 일본 등 장래 북한 투자할 국가와의 외교마찰을 우려한 북한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밝힌 김운규 현대아산 사장의 발언이 더 정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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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장관의 3월 17일 상하이 행적

그러나 결국 박지원 장관은 3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상하이 비밀접촉에도 참석하고 정몽헌-송호경 비밀회담에도 '옵저버'의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북한 개발사업과 정상회담이 '동시 패키지'로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 정몽헌 회장이 2000년 4월 8일 당시 박지원 장관이 베이징에서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을 만나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기 하루 전에 베이징에 갔다가 10일 귀국한 바 있어 이 때도 자리를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던 이익치씨도 4월 7일 베이징을 방문했다 9일 귀국했다. 이런 사실들은 '동시 패키지' 진행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국정원의 전직 간부는"2000년 3월17일 상하이 비밀접촉 때는 이미 북한측이 정상회담에 대한 원칙적 동의 카드를 들고 나온 시점이었다"면서 정상회담 대가 의혹을 일축했다. 그는 "당시 현대그룹은 금강산관광 비용이란 명목으로 매달 800만 달러를 꼬박꼬박 북한 계좌에 입금시켰다"면서 "따라서 남북이 결혼(정상회담)에 앞서 연애단계에 해당하는 98∼99년 사이에 '데이트자금'으로 현대그룹의 돈줄을 활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5억 달러는 본질적으로 현대의 7대사업 독점 계약 대가금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전직 간부는 "물론 현대가 98년말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으로 대북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남북관계 진전은 사업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기에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현대가 대북 사업권을 따내는 데 적극 지원했다"면서도 오히려 어떤 점에는 현대가 북측에 사업을 따내는 대가로 거액을 약속하는 등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견제를 했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5억 달러는 사업권 획득 '리베이트'"

금강산종합개발계획 조감도.
금강산종합개발계획 조감도.현대아산 제공
이 관계자는 "2000년 8월에 체결된 현대와 북한간의 대북관련 합의서가 그해 5월에 거의 완성돼 문서화만 남겨둔 상태였던 점으로 미뤄볼 때, 같은 해 6월 현대의 대북 송금은 미래 사업에 대한 '선투자'로 볼 수 있으며 사업권 수혜는 현대아산이 받고 송금은 현대상선 등 계열사들이 한 점으로 볼 때 일종의 '리베이트'라고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도 지난 2월2일 아태 대변인 명의의 성명에서 "현대가 추진해온 개발사업은 관광, 철도, 통신, 고선박 해체, 최첨단전자공단, 임진강댐, 개성공업지구 등 내용과 규모가 방대하다"며 현대가 대북관련 비용으로 사용한 2235억원이 '7대사업'과 관련돼 있음을 시사했다. 북측은 그러나 이 성명에서 이 돈이 '7대사업'의 사업권을 보장해주는 대금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5억 달러의 성격 규정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체크 포인트가 거론된다. 하나는 남북한이 4·13 총선 직전에 합의사실을 발표한 점과 6월10일 정상회담 직전에 방북날짜를 12일에서 13일로 하루 늦추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우선 후자의 경우 북한측이 5억 달러 가운데 1억 달러가 미입금된 것을 이유로 정상회담을 하루 늦춘 만큼 이 돈에는 정상회담 성사와 관련된 대가금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의 국정원 전직 간부는 "북측이 일정을 하루 늦춰 우리측에 겁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돈이 송금 안되었기 때문에 아니라 북측의 보고라인에 문제가 있어 입금사실이 상부에 전달이 안되었기 때문이다"고 사정을 밝혔다.

전자의 경우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남측보다는 북측의 주도하에 발표 날짜가 잡힌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북 사업에 밝은 한 북한 소식통은 "정부 돈은 일원 한푼 안줬다는 박지원 실장의 말은 사실이라고 본다"면서 "그러나 민관(民官)이 따로 없는 북측의 사고방식으로는 현대가 준 5억 달러를 사업권 획득과 정상회담 성사에 따른 일종의 '축하금'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측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남측 정부에 '총선 전 정상회담 합의 발표'라는 '선심'을 쓴 것인데 그 결과는 북측 의도와는 달리 여당의 패배로 끝났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가 북한에 송금한 5억 달러의 성격이 7대 사업 독점계약 대가금인지, 리베이트인지, 아니면 정상회담 대가금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점은 북측 요구로 박지원 장관이 나섰으며, 북측이 '얼굴 없는 국정원 간부' 대신에 김대통령 특사와의 '합의'를 원한 것은, 북측으로서는 '장사꾼'에 불과한 현대와의 '7대사업' 계약에 대한 남측 정부의 담보(보증)를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300억 달러가 예상되는 거대한 북한 개발 프로젝트를 따낸 현대로서도 정부의 '보증'이 절실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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