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지게는 언제 만들어 주실라요?”

두 해를 졸라 드디어 일곱살 때 내 지게를 얻었습니다

등록 2003.02.17 17:06수정 2003.02.18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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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게에 발채를 얹어 짐을 나르는 농부

지게에 발채를 얹어 짐을 나르는 농부 ⓒ 김규환

나는 아홉 살 때 학교에 들어갔다. 키가 다소 작기는 했지만 6남매 중 손위 세 사람과 동생은 7살이나 8살 때 정상적으로 학교를 보냈는데 이상하게 바로 위 형과 나만 9살 때 학교를 보내셨다. 그러니 1975년이 내가 학교에 들어간 해라는 걸 쉽게 기억한다.


또 한가지 도움이 되는 지형이 있었다. 동네에선 큰물져 홍수 날 때마다 매번 보가 쓸려가 농사지으려면 봄에 집집마다 한 명씩은 나와 거대 공사를 연중행사로 벌여야 했다. 그 해 봄엔 돌을 져다가 보막이를 하지 않고 시멘트 구조로 보를 막아 ‘1975. 4. 12’라고 적어 놓았다. 오가는 산길이 10리가 되는 차일봉 근처에 논과 밭이 있어 지게를 지고 그 보를 지날 때마다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를 늦게 들어간 까닭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일찍 보내 보았자 공부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급격히 기운 가세(家勢) 때문에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에도 농사일에서 한 몫을 톡톡히 하리라 여긴 어른들 생각에 1년 늦게 보낸 경우라 하셨다. 우리 마을 한 친구네는 자식들마다 10살 때 보내는 게 원칙이었으니 우리집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가족 수에서도 집집마다 5명 이하의 자녀를 낳은 부모들은 웬일인지 힘이 없어보였다. 6명은 기본이고 7명, 8명은 낳아야 했고 더군다나 아들 숫자는 가세와 노동력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는데 동네에서 싸움판이 한 번 벌어지면 마구 달려 들어 싸우던 때라 무시 못할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나무 더미를 쌓아 나가는 데서 식솔 늘리는 이유가 판가름이 난다. 남자들은 서너 다발, 여자는 한 다발 씩 해 올 수밖에 없어 남자 대여섯 명이 하루 세 번 나뭇짐을 해오면 하루에도 나무더미 하나를 장만하는 수도 있기에 식구 숫자는 대단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니 이미 자녀가 6~7명이 되는데도 어머니들이 마흔을 넘겨 아이를 낳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이 이해가 간다. 더군다나 아버지들의 아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6.25를 처절하게 겪었던 터라 언제 다시 전쟁이 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하나라도 더 낳아야 했던 절박함이 깊게 밴 시대적 산물이다.


힘으로 밀어붙이던 1980년대 초반 까지는 그래서 동네가 처녀 총각이 넘쳐 났다. 4~50호만 되어도 한 집 당 평균 인구수가 부모 포함 8명이 되므로 최대 400명에 이르렀다. 나도 그 좋은 시절을 어린 나이에 눈으로 보면서 지내서 그런지 어릴 적 그 북적대던 마을 풍경과 추억이 더 그립다.

어머니가 만든 한글 공부판
안보고도 척척 외시는 엄마 선생님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갸냐댜랴먀뱌샤야쟈챠캬탸퍄햐
거너더러머버서어저처커터퍼허
겨녀뎌려며벼쇼여져쳐켜텨펴혀
고노도로모보소오조초코토포호
교뇨됴료묘뵤쇼요죠쵸쿄툐표효
구누두루무부수우주추쿠투푸후
규뉴듀류뮤뷰슈유쥬츄큐튜퓨휴
그느드르므브스으즈츠크트프흐
기니리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 김규환
학교는 아홉 살에 들어갔으나 한글은 어머니께서 손수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 보다 일찍 깨우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선지 개중 깨끗하고 큰 종이를 하나 구해와서는 또박또박 “가나다라…가갸거겨” 판을 적어 벽에 붙여 놓으셨다.


고단한 일을 마치시고 호롱불을 벽 쪽으로 가져와 적어둔 판을 가리키면서 하나하나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나는 위에 형과 누나들이 즐비했는데도 어머니로부터 직접 한글을 깨우쳐서 그런지 발음도 정확하고 말 뜻을 선뜻 이해하는지도 모른다.

한글을 깨우치기 1년 전인 6살부터 나는 아버지를 무지하게도 성가시게 했다. 약주를 즐기셨던 당신께서 기분 좋게 헛기침을 하시고 집으로 들어오시는 틈을 보아 시도 때도 없이

“아부지, 제 지게 언제 맹그라 줄라요?”
“형 것은 작년에 만들어 주셔놓고 왜 그러시요?” 하며 다부지게 여쭙고 따졌다.
“글고라우 옆집 아그들도 다 만들었다구만이라우~”

그런데도 어르신께선 묵묵부답이었다. 그해 가을이 되고 해가 바뀔 즈음이자 한글을 깨우칠 무렵 아버지께 또 몇 번이고 졸랐더니,

“알았네, 우리 아들 말도 잘 듣고 부지런한께 이쁜 지게 하나 맨들어줘야제. 아부지가 나무를 봐 뒀다. 소나무를 벼다가 잘 말려야 헌께 쬐까 시간이 걸릴 건게 그리 알거라.”
“예, 아부지.”

날아갈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내 지게가 만들어 지다니. 나도 내 지게로 짐을 져 나를 수가 있다. 겨울에는 형들 따라 나무를 하러 다니고 봄 여름 가을에는 소 ‘깔’(꼴, 소 먹이 풀)을 베어다 줄 수 있다. 밤새 엄마 옆에 붙어 “아부지가 지 지게 만들어 주신다요. 엄마 좋제?” “하믄 좋고 말고. 참말로 좋구만.” “이제 우리 규환이도 ‘실군’(#1)인께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지고다녀라와~”
“알았어라우~.”

그날 나는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번 아들과 약속을 하셨던 터라 아버지께선 얼른 서두르셔야 한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내 지게가 만들어 지길 고대했다.

a 똥장군을 올려 놓은 지게

똥장군을 올려 놓은 지게 ⓒ 김규환

아버지께선 산에 가실 때마다 내 지게 감을 보고 다니시느라 소나무밭 근처에 가시면 눈을 잠시도 한 곳에 두지 않으셨다. 복령 캐러 나갈 때든, 나무를 하러 가실 때든 막내 아들 손에 김치와 밥을 보자기에 싸서 들리고 'ㅏ'자 형으로 잘 뻗은 나무를 고르시는 아버지. 나무 형태는 원줄기는 부드러운 곡선을 유지하며 땅에 닿을 부분이 앞쪽으로 조금 튀어나와야 하며 짐을 실을 뒤쪽 윗부분의 가지는 위로 보기 좋게 들려 있어 짐을 껴안아야 좋다.

어느 쓸만한 하나를 점 찍어 놓으신 지는 오래되었다고 하시는데도 선뜻 일에 착수하지 못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다. 지게를 만들려면 하나 가지고는 안되기 때문이다. 나무 두개가 똑같지는 않아도 닮아 있어야 지게 감으로 쓰일 수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어느 때 나무를 한 개씩 가져 오셨다. 껍질을 벗겨 그늘에다 두어달 가량 두신 다음 하루 날을 잡아 끌과 망치, 톱, 대패, 낫을 준비하시고 연장통을 찾으신다. 뭐 하나 만드시는데도 튼튼하고 볼품 있게 만드시는 아버님이시기에 나는 더 내 지게를 애타게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먼저 톱질을 하여 크기보다 다소 길게 길이를 결정하고 무쇠낫으로 대강 사각형태를 맞춰 깎아 나가신다. 다음 손대패로 다듬는다. 나는 대팻밥이 또르르 말리는 광경을 지켜보며 소나무 향을 맡느라 옆에서 뽀작거리고 앉아 있었다. 옹이가 있는 부분에서 나온 나뭇결은 보기에 참 좋았다.

다듬질을 마쳐 놓으시고 점심을 드셨다. 형들과 누나는 뒷골로 가서 소나무 삭정이를 자기 몫만큼 해서 집으로 돌아와 점심 먹는데 합류한다. 김치국밥을 끓여서 온가족이 방안에 가득 모여 밥을 먹는다.

“규환이는 잘나오는 연필 하나 찾아서 갖고 나와라와~”
“예, 아부지.”

진지를 잡수시고 다시 아버지는 끌과 망치로 조심조심 지게를 연결할 네 곳 각각의 나무에 높이를 정확히 재서 먹줄을 놓으시고 연필로 그어 표시를 하고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아래 쪽 구멍은 더 크다. 구멍 뚫기를 끝내시고 지게 감 나무 두개를 가로로 걸쳐 연결할 참나무를 납작하게 깎으셨다. 나는 ‘뚤방’(마루 아래의 턱이 진 곳으로 마당보다 높은 땅)에서 나무를 꼬옥 밟아 아버지를 도와드렸다.

이제 조립만 하면 일이 끝난다. 한 쪽 나무를 바닥에 대고 네 개를 툭툭 망치로 살살 쳐가며 다 꽂은 다음 맨 아래 것부터 다른 쪽에 끼우신다. 홈이 너무 작은 것은 살짝 늘려서 파고 너무 크면 나무 조각을 끼워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30여 분 어루만지시더니 조립이 다 되어 지게 모양새를 갖췄다. 완성품은 아니어도 지게 만드는 작업을 대강 마치셨다.

탐진 짚다발에 물을 적셔 보드랍게 한 다음 양쪽 멜빵을 따는데 30여 분 더 소요했다. 아이 머리 따듯 해나가는 솜씨를 나는 언제나 배울 수 있을까? 등받이 판도 짚으로 엮으셨다. 둘 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만들면 3~4년은 써야되므로 비를 맞지 않게 잘 보관해야 하는 것은 내 몫이다.

드디어 질긴 짚과 삼 껍질을 섞어 엮은 줄을 연결하니 지게가 완성되었다. 다음 장에 ‘띠꾸리’(#2)만 하나 사다 가운데 부분에 묶어주면 짐을 싣는데 별 지장이 없다. 나는 하루 남은 장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손 위 형의 지게에서 줄을 풀어 내 지게에 묶고는 해가 어둑해질 무렵인데도 가까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간다고 집을 나섰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어른이 될 때까지 쓰라고 돌부리에 치일까 걱정이 되게 지게를 크고 길게 만들어 주셨다.

(#1)실군: ‘실한 일꾼’을 일컬음.
(#2)띠꾸리: 나일론 줄이 나오기 전에는 대마 삼 껍질과 짚을 섞어 손수 꼬기도 하고 칡넝쿨 섬유질 만을 분리하여 꼰 줄을 사용했다.

덧붙이는 글 | 그 뒤로 일 하는 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농사꾼이 천직인지도 모르겠네요.

덧붙이는 글 그 뒤로 일 하는 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농사꾼이 천직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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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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