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돌아보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꿈인가 싶습니다. 2002년 상반기, 하늘을 치솟을 듯한 기세로 모두를 놀라게 했던 '노풍(盧風)', 그리고 이후 그것이 어이없게 가라앉으면서 후보 자리마저 보존하기 어려웠던 시절, 선거 직전 정몽준 지지 철회로 인한 단일화 전선의 공중분해, 초읽기로 들어갔던 민노당 지지자들에 대한 지지 읍소, 기적 같은 승리 등, 우여곡절을 지나면서 마침내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우리는 뜨겁게 환호했습니다.
그야말로 냉전수구세력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치고 이루어낸 역전의 드라마였습니다. 그로써 우리는 역사의 정도(正道)를 걷는 일이 현실에서 패배를 예감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감동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노무현 정권이 정식 출범하려는 이 순간, 이 나라는 혼란과 우울한 분위기가 뒤덮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는데, 열화와 같은 기대보다는 실망과 걱정의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노무현 정권 수립을 지지했던 세력 일부가 노무현 당선자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 벌써부터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결코 우습게 봐 넘길 일이 아닙니다.
노무현 지지 세력 내부의 민심 이반
이러한 이탈 내지는 내부적 반발현상은 특히 김대중 정권의 대북 송금과 관련한 노무현 당선자 자신과 노무현 진영의 자세에 대한, 실망을 넘어선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경악스러움이 한데 섞인 '메시지가 분명한 정치적 발언'입니다.
아직 취임도 하기 전에 너무 성급한 비판이 아닌가 할 수 있으나, 당선 이후 100일의 절반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노무현 당선자 자신과 그 진영이 가지고 있는 문제 해결의 방식과 자세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향후의 방향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취임 이후는 그 실체가 보다 분명하게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상황이 더 이상 진전되기 전에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과 수준에서든, 지금의 시점에서 대북 송금 문제를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규명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장의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우리의 향후 외교 일체에 대응력의 약화와 신뢰성의 위기를 자초할, 외교사적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무지와 정파적 논리의 결과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퇴임하는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선택을 철저하게 엄호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는 그 다음 단계에서 다른 누가 아닌 노무현 정권 자신의 방어망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냉전수구세력과 미국의 대한반도 봉쇄·압박 전략의 강화라는 커다란 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사태를 보다 본질적으로 극복해내려는 의지와 자세가 없는 한, 노무현 정권의 앞날은 이들의 봉쇄·압박 전략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그에 따른 정치외교적 수단의 지속적인 약화·상실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노무현 당선자와 노무현 진영에 대한 지지 세력 내부의 비판을 그저 가볍게 보거나 반대세력의 공작적 음해라고만 이해한다면, 노무현 정권은 그 출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이 될 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를 단지 개혁정치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환기적 진통이라고 이해하려 든다면 역사의 진정한 육성을 듣지 못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백치정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단지 권력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니라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각성의 원인은 노무현 당선자 자신과 그 진영의 정치 외교적 오판에 그 뿌리가 있다는 점에서, 우려는 깊고도 깊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그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습니다. 전쟁이냐 평화이냐 하는 민족생존의 엄중한 기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한반도의 주변상황은 날이 갈수록 적대화 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여파로 우리 경제는 바람 앞에 촛불이 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세계제국 미국의 총칼과 자본의 힘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사방에서 조여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전쟁의 논리에 무기력하게 끌려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가서 무얼 어떻게 해보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절통한 상황이 닥칠지 모릅니다.
전 세계의 반전평화 운동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시정권은 막무가내의 침략주의 노선을 줄기차게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외세와 그를 따르는 세력의 야만적인 공세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민족 내부의 논의와 협상의 내용을 그대로 밝히고 투명한 방식으로 일을 풀어가겠다는 것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민족의 단결을 도모해야 할 지도자의 책임
이런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지도자가 민족 전체를 뜨거운 열정과 선명한 논리, 그리고 자기희생적 헌신의 자세로 단결시키는 일입니다. 무엇이 제일 중차대한 일인가를 일깨우면서, 그 일에 우리 모두가 하나의 힘을 쏟아놓고 타개해나가는 역량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국민 총화 단결과는 내용과 질이 전혀 다릅니다. 당시 그것은 강권과 압박에 의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사적 안목과 민족사적 의지를 가진 감동적 설득과 합리적 설명, 존엄하고 진지한 자세로 이룰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그 진영은 선거 이후, 그 승리의 열기와 감격을 이 시대 민족사가 요구하는 작업에 쏟아 붓기보다는, 그 힘이 이리저리 갈라져나가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승리가 확인된 역사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개혁전선의 대통합을 위한 광활한 포용력을 보이는 일보다는, 이른바 '친노(親盧)'라는 자파 세력의 배타적 권력 장악을 위한 편협한 종파주의적 선택으로 민주당 내부의 역량을 분열시켰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당도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로써 개혁전선형성이 구태의연한 권력투쟁의 장으로 전락하였고, 그 결과 한반도 평화의 축을 세우는 일에 필요한 평화/개혁적 역량을 총집결하는 작업이 지체되고 외교적 판단에 올바른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현실의 주도권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반동적 대응에 몰두하고 있는 냉전수구세력에게 일부 이동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선거 직후 초반기에는 자신들의 선택이 실패함으로써 잔뜩 긴장하고 '노비어천가'라고 할 만큼의 의도적인 정치적 찬사를 보냈던 보수 언론들이 어느새 자신감을 회복하고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는 현실은 노무현 진영의 자해적 조처들이 이렇게 저렇게 쌓인 결과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대한반도 압박·봉쇄전략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 내부의 역량을 모을 기회를 놓쳤고, 스스로 그 응집의 귀중한 근거지를 해체하는 이해할 수 없는 자충수를 두기도 하였습니다. 한반도 평화의 내적 역량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던 촛불시위에 대한 자제 발언과 함께 모순에 찬 <친미적 자주론>을 폈고, 방미단은 미국의 입장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노무현 알리기에 역점을 둔 나머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 자신의 역 봉쇄전략에 기초한 외교적 기조를 공세적으로 알리고 펼쳐나가는 일에 그다지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