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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쓰는 표현으로 질풍노도와 같았던 80년대적 꿈과 이상이 쓰러진 자리에는 아픈 회한과 눈물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눈물과 회한조차 돈이 된다면, 춤추는 자본의 기획으로 포섭되어 최신 유행의 상품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난무하던 지난 9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았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체게바라일 것이다. 그의 사망 30주기를 추모하는 물결로 시작한 흐름은 그의 피가 묻힌 안데스 산맥에서, 그의 시신이 누워 있는 쿠바에서, 그의 죽음을 사주했던 미국에서, 심지어 생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90%는 넘을 대한민국에서조차도 하나의 '유행'이었다. 대학가에 휘날리는 짙은 수염의 체의 초상화, 체의 얼굴이 붉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 그 티셔츠의 뒷면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Revolution Forever!"
헉! 내가 그걸 보고 들었던 첫 느낌의 표현이었다. 혁명을 찬양하는 그 문구가 놀라운 게 아니라 혁명조차 돈이 된다면 '상품'으로 팔아먹는, 영악한 자본의 속성이 새삼스러워서 그랬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포스트모던' 세태를 새삼 나무란들 무엇하랴. 이기와 물질에 찌든 현대인에게 어쩌면 그런 '변덕'조차 고마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혁명은 더 이상 시대의 유행은 아니겠으나, 그 혁명이 해결하려던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의 자유와 정의를 억압하는 그 모든 현실이 있는 한…. 그런 현실 앞에서 우리도 이젠 마냥 목놓아 괴로와하기보다는 적당히 영합할 줄 아는 '솔로몬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든, 그 꿈과 이상의 복원을 기원한다. 그 꿈, 체게바라가 안데스 산맥에서 고립돼 죽어가는 순간에도 결코 놓지 않았던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가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게릴라 대원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말이다. 불가능한 꿈. 물론 이건 결코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었다. 이걸 그는 쿠바혁명을 통해, 소수 게릴라 대원들을 이끌고 농민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려 그 꿈을 실현시켜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혁명후 그는 쿠바 국립은행 총재와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혁명후 쿠바사회 건설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고, 뛰어난 언변을 활용해 외교관으로 나서서 전 아메리카 대륙에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마침내, 그 자신이 역설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혁명 실현을 위해 피델(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 남기고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스며든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해방된 사회가 아니라 압제에 맞서 싸우는 볼리비아 민중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이런 체게바라였기에 당시 미국정부는 그가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게릴라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선 그의 제거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가 10월의 안데스 산맥에서 볼리비아 정규군에게 생포되고도 18시간만에 사살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판이니 뭐니 하는 과정을 거치다간 전세계적으로 일어날 구명운동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이름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체게바라를 생각하면 난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루이 알뛰세와 레지 드브레. 현대 프랑스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이야 익히 들어 봤을 테고... 사제지간인 이 두 사람의 관계 속에도 체게바라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스며든다.
전유럽을 강타했던 68년 5월 혁명의 진행 속에서 '멍청한' 각국의 사회당, 공산당 지도부는 노동자, 학생들이 주도하는 사회혁명의 열기를 승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혁명의 열기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 혁명지도부로부터 배척당하는 웃기지 못할 사태로까지 이어진다(그리고 이것이 68년 5월 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남는 중대한 이유가 된다). 이 와중에서 노동자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좌파 이론가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알뛰세의 말만은 경청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 알뛰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레지 드브레. 알뛰세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던 그는 체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서 있을 곳도 그곳이다'라는 듯 만류하는 알뛰세를 뒤로 하고선 체를 따라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뛰어든다. '파리고등사범'의 촉망받는 철학자에서 게릴라 전사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알뛰세는 드브레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투쟁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있지. 하지만 (...) 때로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결정적인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긴요한 것일세. (...) 투쟁에서 면제된 이 시간은 결국 투쟁 자체 속에서 시간을 절약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네."
(L. 알뛰세, 「레지 드브레에게 보내는 1967년 3월 1일자 편지」)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론연구에 전념하는 게 싸우는 시간을 앞당길 수도 있는 것이니까 '니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구를 해라'는 말이다.
그런데 난 이런 레지 드브레에게서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그렇게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까지 찾아가 무장투쟁에 가담했던 드브레는 생포되고 난 뒤 국제적인 청원운동으로 다시 프랑스에 살아 돌아와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는 '이미지론'에 몰입하면서 현실운동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 지난 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인 좌파의 죠스팽 대신 우파의 시라크 지지선언을 해 그의 전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체게바라 전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볼리비아의 산 속에서 체가 유일하게 신뢰하고 의지했던 레지 드브레, 마지막 10여 명이 남을 때까지 끝까지 저항하다 체와 함께 포로가 되었던 레지 드브레. 그는 과연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이렇게 '체게바라' 라는 이름은 60년대 유럽 젊은 지성들의 이정표이자 마음 속에 진 빚으로 남아있는 이름이었다. 체 역시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선택받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뛰어난 게릴라 전략전술가로서, 뛰어난 혁명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한 인텔리 출신이었기에... 그들이 머리 속으로만 그리고 있던 것을 체게바라는 몸으로 실천해 보인 것이다. 진정 60년대는 체게바라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손에 다시금 '체게바라 평전'이 펼쳐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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