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씨의 석방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는 민가협 어머니들권박효원
울산에서 김이경씨와 함께 서점을 운영하던 박경순씨는 98년 7월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단체인 '영남위원회'를 구성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7년형을 받았다. 국민의 정부 최초의 '반국가단체 사건'이였다. 부인 김이경씨를 비롯, 15명이 구속되어 형을 받았다.
당시 박경순씨는 간경화증이 악화되어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식이요법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박씨는 감옥 내에서도 민간요법 치료를 계속했고 증세도 나아지는 듯 했다. 함께 구속된 동료 15명이 단식농성을 벌일 때에도 그는 음식을 끊지 않았다. 단식은 간경화 환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건강을 지키려고 애쓰던 박경순씨가 2월 27일부터 목숨을 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김이경씨는 "남은 2년 반, 못 살 게 뭐 있냐. 그냥 다 살고 건강하게 나가자"며 단식을 만류했지만 "양심수라고 감옥까지 들어왔는데 이런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남편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박경순씨가 단식을 결심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양심수 사면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사실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만 해도 박씨와 가족들은 '정치수배 해제까지는 어려워도 양심수 전원 석방은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길었던 4년 7개월 동안의 감옥생활도 이제 끝나는가 싶었다.
아들 정우(13)군은 박경순씨에게 "노무현 아저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요. 너무너무 기쁘고 좋아요. 아빠도 이제 곧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 거예요"라고 편지를 보냈다. 양심수가 뭔지도 모르는 채 경찰이 엄마아빠를 잡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8살짜리 아들은 어느새 중학생이 됐다. 당시의 정신적인 충격은 잊었지만 정우군은 지금도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설명하기 힘들어한다. 김이경씨는 면회와서 "아이스크림 사달라"며 울던 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아직도 눈물이 난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뙤약볕에서 자전거를 가르쳐준 자상한 아빠, 서점을 운영하며 24시간 붙어있던 다정한 남편이 이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자의 꿈은 곧 깨졌다. 개혁을 표방한 '참여정부' 대통령이 내린 조치는 정치수배 해제도, 양심수 전원석방도 아닌, '무사면'이었다.
독재정권에서도 대통령 취임식 때마다 있었던 양심수 사면이 개혁정부에서 없다는 것을 김이경씨는 믿기 어려웠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조금만 기다리면 3월 중순 즈음 사면이 있지 않을까' '설마 강금실 장관이 양심수를 죽일까. 뭔가 말이 나오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설마' 하면서도 "혹시 이러다 이 사람 이대로 보내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에 김씨는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다고 토로한다.
"'개혁정부'라 양심수 사면 안 한다.
양심수 문제 풀려야 개혁도 가능"
▲"제 남편 박경순을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부인 김이경씨권박효원
김이경씨는 "노무현 정권은 '개혁정부'이기 때문에 양심수 사면을 안 했다"는 다소 역설적인 주장을 폈다. 독재정부는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제스추어를 보이려고, 김대중 정권은 출범초기 강조된 인권여론 때문에 각각 양심수를 사면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노무현 정권은 국민에게 신뢰를 받고 있으니 양심수 사면이 없어도 양해받을 수 있는데다가, 오히려 사면이 수구보수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자신의 주장을 폈다.
김씨는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진정 국민을 믿는다면 수구보수세력 눈치볼 것 없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국민의 지지 속에 출범한 정권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 하나 못 풀면서 무슨 개혁이냐"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박경순씨 역시 단식을 시작하면서 "양심수 문제가 올바르게 풀려야 노무현 정권도 이후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김이경씨는 "바깥에서 내가 할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생긴 일이다. 남편의 단식은 지금이라도 싸워달라는 부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사면이 없어 절망에 빠졌던 양심수 가족들이 이번 단식농성을 바라보며 희망을 느끼고 있다"며 "남편이 이대로 죽는다 해도 개죽음은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초파일, 8월 15일, 연말 등 대규모 사면이 이루어지는 철이면 늘 남편이 출소한 뒤 입을 옷을 준비했다는 김이경씨는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말할 때 남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이제라도 남편이 건강하게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 | | 단체명 바뀌고 단체구성항목도 없어 박경순씨 제외한 연루자 전원 무죄석방 | | | '영남위원회' 사건이란? | | | | 98년 7월 박경순씨 부부와 김창현 당시 울산동구청장 등 15명은 "90년대 초반부터 울산지역에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지하혁명조직 '영남위원회'를 구성하려 했다"는 혐의로 징역 3~15년의 중형을 받았다.
현 정부 민정수석인 문재인 변호사를 비롯한 인권변호사와 시민사회단체들은 "경찰이 증거로 제출한 디스켓의 입수경위가 불명확하고 검찰이제시한 조직명칭도 번복한 데다가 단체구성내역이 없다"며 연루자들의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경찰과 검찰이 긴급체포영장과 수사과정, 공소장 등에서 조직 이름을 여러 차례 바꿨다는 것 역시 의문점으로 남는다. 이들 문서는 단체명을 각각 '반제청년동맹 영남위원회' '한민전 영남위원회' '조선노동당 영남지역당' '영남위원회'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게다가 반국가단체 구성죄가 성립되기 위해서 필요한 단체구성 3대항목인 강령과 규약, 자금내역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경찰이 증거로 내세운 디스켓은 '협조원이 제공했다'고 알려졌으나 그 신분은 '수사기밀'이라는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이렇게 간접 보고된 증거는 형사소송법상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결국 재판부는 2심에서 박경순씨를 제외한 연루자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부인 김이경씨 역시 2000년 1월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수괴'로 지목된 박씨는 1심에서 15년형, 2심 등에서 7년형을 선고받아 유일하게 복역 중이다.
김이경씨는 "사면을 위해 여러 곳을 뛰어다니면서 관계당국 측으로부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경순만은 내줄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아마도 조작의혹이 많았던 사건이라 검찰 자존심 때문에 석방을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권박효원 기자 | | | | |
덧붙이는 글 | 박경순 후원계좌 우리은행 525-097577-02-101(김이경)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여러분이 우리 남편 살렸습니다" 한 양심수 목숨건 단식농성 중단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