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따라 시산제, 봄을 맞이한다

등록 2003.03.10 19:36수정 2003.03.1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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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유난히 파랗다. 시원하다. 며칠 동안 찬 비가 내렸어도 봄이 오고 있긴 한가보다. 마르고 찬 겨울 보내느라 고생한 이들이 봄 기다리는 마음이야 한결같겠지만 산 좋아하는 이들에게 봄이 온다는 소식은 유난히 반갑다. 생명이 움트는 산에 안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발장에서 등산화를 꺼낸다 장비를 손질한다며 바쁘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얼었던 길이 녹는다고 덥석 산에 오를 수는 없다. 지엄하신 산신께 제를 올려 '우리 간다' 알리고 일 년 내내 평안케 길 닦아 주십사 고하는 시산제를 올리는 게 먼저다. 지난 일요일 흥겨운 시산제가 있었기에 여러분께 알린다.

북한산 밑자락. 사람들은 오락가락 복잡하고 차량은 종횡무진. 산으로 숨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 온다는 사람들이 늦는다. 기다린다.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 산행대장에게 뒷사람을 챙겨주십사 맡기고 도선사 입구까지 걸어 올라간다. 잘 닦인 길, 택시에 자가용에 많은데 왜 걸어 오르느냐 싶지만 산에 왔으니 걷는 게 가장 정직하고 아름답다. 부득불 짐 실은 차를 먼저 보냈을 뿐이다. 도선사 입구에는 차와 사람이 뒤엉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서둘러 일행을 찾아 준비를 서두른다.

산에서 올리는 제라고 해도 준비할 게 많다. 어떤 제든 빠지지 않는 것. 큼직한 돼지머리. 산에서 하는 제라고 해도 빠질 수 없다. 입꼬리 잘 올라가 웃음이 보기 좋은 녀석으로 골라 잘 삶아두었다. 상자에 담아 곱게곱게 담아 배낭에 진다. 귀 접힐라 코 눌리라 조심조심 담고 나서도 챙겨야 할 음식이 많다. 편육이며 김치며 떡이며. 간단하게 챙겼는데도 모이는 사람 생각하고 나눌 사람 생각하며 챙긴 것이라 무게가 만만치 않다. 여러 배낭에 겨우 나눠 지고 나니 출발 준비 완료. 술과 과일은 각자 하나씩 준비하기로 해 두었으니 그 나마 다행이다.

북한산 입구에서부터 매연을 내뿜으며 신도만을 실어 나르는 버스 덕인지 부쩍 커진 도선사를 지나 좁은 길에 들어선다. 산 아래에서는 성마른 아가씨들 반팔 옷을 손질하고 있는데 이곳은 아직도 눈이 얼어 땅땅하다. 아이젠을 챙겨오지 못한 이와 한 짝씩 나눠 신고 조심조심 산을 오른다.

조심조심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느긋하게 오르는데도 슬슬 근육이 뭉쳐온다. 겨우내 잠재웠던 몸이 마음을 읽어주지 않는가. 자꾸만 숨은 밭아 오고 걸음은 더뎌진다. 걸음보다 쉼이 길기를 몇 십 분. 세 살, 네 살 개구쟁이를 데려온 가족만을 뒤에 두고 일행과 한참을 떨어졌다. 정상 가는 길이 아니라 다행이다. 급한 마음이 아니니 그나마 포기하고 주저 앉지는 않는다. 쉬며 가며 물 나눠 마시며 오랫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로 웃으며 미끄러지며 가니 가파른 비탈 위로 능선이 보이고 성곽이 보인다. 한참 힘을 끌어 올려야겠지만 시산제를 올릴 야영장은 가까이에 있었다.

야영장에서는 먼저 도착한 이들이 한 숨 돌리며 잠깐 회포를 풀고 있었다. 배낭을 벗고 그 틈에 잠시 끼었다가 손이 바쁜 준비를 거든다. 눈이 녹아 질척한 땅이지만 지붕이 있어 다행이다. 상자를 깔고 그 위에 돼지머리 올리고 돗자리 깔아 마른 자리를 마련한다. 과일을 깎고 떡을 내는데 제기 준비한 형이 아이 때문에 늦어진다니 막내 달려가고 매트리스(등산용 휴대깔개) 깔아 절할 자리 만든다, 등산 장비를 올린다며 부산하다. 미리 준비해 온 제문을 점검하고 양초에 한지를 말아 상향 위한 큰 불 준비까지 끝내고 시산제 절차를 간략하게 한 번 점검하고 나니 준비가 얼추 끝난다.

입꼬리가 올라간 게 복스럽다
입꼬리가 올라간 게 복스럽다산누리
명이라는 밝은 이름의 개구쟁이가 아빠 손을 잡고 도착하니 일행이 다 모였다. 바로 시산제를 시작했다. 올 한해 안전 산행과 온갖 잡귀 물리칠 액막이의 원을 담은 제문 읽어 하늘로 날려보내고 동호 회장이 두 번 절한 뒤 돼지머리에 정성을 꼽고 술 올렸다가 음복하고 남은 것은 사람들께 장난스레 뿌린다. 모인 사람 모두 절하고 정성 꼽고 음복한다. 마냥 엄숙한 제는 아니다. 정성 꼽는 일에 유난히 사람들은 관심이 많고 목소리도 높다. 이름만 남은 허례허식이 아니니 자유스러워 더욱 흥겹다.


산신께 드리는 제가 끝났으니 사람을 위한 잔치를 시작할 때다. 지난 한 해 동안 산행을 열심히 한 산적(동호회에서 서로를 부르는 공식? 명칭이다)에게 상을 수여하고 몇 가지 명목의 시상식이 이어진다. 상품은 모두 등산 장비. 모두모두 새 장비 받아 산을 더 사랑하고 더 자주 산에 안기라는 격려의 의미다. 때때로 박수가 크게 터져 나온다.

이 때쯤이면 점심을 거른 배가 쪼록쪼록 급하게 음식을 찾는다. 눈 앞에 푸짐한 음식이 있으니 뭘 더 기다리랴. 떡이며 고기며 접시에 나눠 담고 막걸리 흔들어 잔에 따라 돌려 마신다. 술잔이 돌면 돌수록 오랜만에 만나 굳은 표정이 풀리고 북적대는 속에 오가는 말이 살갑다. 돌아가는 술잔은 빨라지고 은근한 취기는 올라와 흥겨움이 더해 간다. 산에서 누리는 흥겨움에 객이 어디 있고 주인이 어디 있을까. 지나는 등산객을 불러 음식을 나눈다. 멋쩍어 하던 객도 금세 술 한잔에 친해지고 나눠먹는 김치 한 접시에 정겨워진다. 정성스런 음식 나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잡것들아 훠이훠이 물러나라.


흥겨움의 막바지 고개는 아나바다. 고가의 등산복을 쾌척한 형도 있고 아껴 두었던 장비를 꺼낸 이도 있다. 싼 값에 서로 필요한 장비를 나눈다. 싸게 팔렸다고 실망하는 이 없고 싸게 팔았다고 서운한 이 없다. 생각보다 싸게 사서 싱글벙글 즐거운 얼굴만 있다.

자리에 흘렸을 지도 모를 병뚜껑 하나 없나 다시 한 번 살피고 시산제를 정리한다. 나온 쓰레기 한 손에 들고 남은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잡아 내려 가는 길 도우며 그렇게 사람들은 봄을 부르는 시산제를 마치고 북한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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