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에 길들여진 아이들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기 전에

등록 2003.03.17 08:23수정 2003.03.1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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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으로 수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가사 중에‘영혼(soul)’이란 단어와 맞닥뜨려 한참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학생회 간부들이 떼를 지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회장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생활 검열을 나왔노라고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마치 돌연한 습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학생회장은 청소년 축제를 인연으로 나와는 아주 각별한 사이다. 하지만 학생부에서도 생활 검열에 대한 사전 언급이 없었고, 학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것은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여겨 유네스코에서 한국 정부에 이를 금할 것을 권고한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냥 자리를 비켜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교사와 학생의 신분이 서로 뒤바뀐 듯한 말들이 오고 갔고, 그러다 보니 분위기가 사뭇 어색해졌다. 처음의 공손하던 모습과는 달리 조금은 경직된 표정에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잠깐 아득한 생각이 들었다. 보수적인 교육관료나 교사가 아닌, 나름대로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아이를 상대로 학생 인권 문제를 운운해야 하다니!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과, 그만큼 커버린 학생들의 소지품을 강제로 뒤지는 것과 어느 것이 더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를 설명하려면 몇 단계의 까마득한 논리적 과정을 거쳐야 할까?

그날의 소지품 검사는 나의 양해로 이루어지고, 수업이 끝나자 곧바로 학생부장을 찾아갔다. 유네스코의 권고를 들먹이며 그런 국제사회의 권고가 아니더라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소지품을 뒤지는 것은 이제는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냐고 따졌다.

평소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눠온 처지라 학생부장도 기분을 상하지 않고 대체로 수긍하는 눈치였다. 다만 그는 유네스코의 권고가 교육부를 통해 각급 학교에 공문으로 하달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발효 단계는 아니며, 4월 중에 학칙 개정의 과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내게 주지시켰다.

사실, 그 동안 학교에서의 생활검열은 자연스러운 하나의 관행이었다. 수업 중에 학생들의 소지품을 뒤지는 일도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차원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직원조회 시간에 수업 중 생활검열을 예고하는 절차는 밟아야 한다. 그 절차가 생략됨으로써 학생회장과의 불필요한 마찰이 있긴 했지만(학생회장은 생활검열이 이미 예고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작은 실수를 문제 삼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가 세계의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잣대를 가지고 우리의 학교현장을 재단하여 불명예스럽게도 비인권국으로 지목하기까지 우리 정부와 학교는 과연 무엇을 했냐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 부자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화와 교육개방을 앞장서서 주장하고 있는 교육정부가 아닌가.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날 학생회장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는 신입생들이 많아져 어쩔 수 없이 소지품 검사를 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런 주장에는 소지품 검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화장실에서의 흡연을 용인하거나 방치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기도 했다.


소지품 검사가 교칙을 범한 소수의 학생들을 단속하기 위해 대다수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학생회장 개인의 한계라기보다는 우리 교육의 한계요, 교사들의 한계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날 학생회장에게 내가 먼저 사과의 뜻을 밝힌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학생회장도 특유의 환한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다음 날 출근길이었다. 지도부 학생들이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의 용모 검사와 함께 지각생을 단속하고 있었다. 시간은 8시10분. 1교시가 시작되려면 무려 50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자율학습 시간에 맞추어 아이들의 걸음이 바빠지고, 1분이라도 늦게 교문을 통과한 아이들은 여지없이 지각생 취급을 당했다. 물론 험악한 말이 오고 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환한 미소로 후배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다운 광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언어의 왜곡 때문이었다. 자율학습이 아닌가? 자율학습인데 왜 지각생 취급을 하는가? 자율학습인데 왜 강제하는가? 강제할 바에는 차라리 자율학습이란 용어를 쓰지 말고‘아침 공부’라고 하면 되지 않은가?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들이 왜 그런 머리는 돌아가지 않는가? 그것은 그만큼 학생들의 언어와 삶의 괴리에 대한, 그로 인한 도덕성 해이를 티끌 만큼도 고민하지 않는다는 증표가 아닌가?

학생회 간부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20분 가량 먼저 학교에 나와 교문 지도를 한다.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과 헌신으로 학교의 질서가 많이 잡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쯤 해서 교문 지도를 그만두면 어떨까? 교문 지도를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니, 아침마다 교문 지도를 하는 것으로 과연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강제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과연 신호등을 지킬까?

자율을 말하면 혹자는 자율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아직 미성숙한 청소년들에게 완전한 자율은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하루 8시간의 타율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가. 남은 시간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시간을 빼앗긴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영혼이 없는 노예일 뿐이다.

요즘 학교 현장에서는 0교시 자율학습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다시금 커지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아침을 거르고 학교에 와서 잠을 자거나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교육자의 양심에 입각한 당연한 요구로 들린다. 교육당국자들은 이러한 최소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세계 교육사에 유례가 없는 0교시 자율학습이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기 전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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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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