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씩씩한 문제아도 있다"

박기범의 <문제아>

등록 2003.03.20 20:37수정 2003.03.2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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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씩씩한 문제아도 다 있나? 있다. 그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문제아>에 나오는 창수는 사실 평범한 보통의 아이였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돈을 빼앗으려 드는 깡패 형들과 그들의 똘마니를 크게 혼내준 사건 때문에 학교에서 영락없이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이나 반 아이들은 자초지종도 잘 모르면서 창수를 맨날 사고나 치는 문제아로 취급해버렸던 것이다. 아이들은 창수를 슬슬 피하고 선생님은 사고만은 치지 말아달라며 아예 내 놓은 아이로 여겨 그에게 관심도 두지 않는다.

정병진
하지만, 창수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스스로 신문배달 같은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는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할머니나 아빠를 걱정하는 마음씨를 보면 누구 못지 않게 착하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그를 겉모습만 보고 문제아라며 자꾸만 따돌렸던 것이다. 이래서 작가는 문제아란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주변의 이해부족으로 인해 오히려 만들어지고 있음을 꼬집고 있다.


알고 보면 작가 박기범 자신이 창수와 같은 문제아다. 아니, 문제 어른이다. 요번에 그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미국이 아무런 정당한 명분도 없이 추악한 전쟁을 벌이려고 한참 으르렁대던 지난 2월 27일에 반전평화 지킴이(소위 인간방패)로 자청하여 다른 몇 명의 팀원들과 함께 이라크로 들어간 것이다. 전쟁으로 아무런 죄도 없이 희생될 게 뻔한 이라크의 어린이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을 생각하며 어찌하든지 자기 몸을 던져 전쟁을 막아보겠다는 일념으로 그리한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반전 평화운동에 적극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아프간 전쟁 때에는 아프간의 어린이들을 돕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반전평화 지킴이 팀원 중에 유일한 동화작가라고 소개된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몹시 궁금했었다. 그래서 그의 처녀작인 이 책도 읽게 된 거다.

그는 어린이 일기장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듯한 서문에다 이렇게 썼다.

"나는 씩씩한 사람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점점 더 약아빠진 어른으로만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제일 슬프다. 챙피하다. 답답하기만 하다."

"어야, 난 뭐라 뭐라 말 잘 못하겠다. 그 대신 약속할게. 이 다음에 또 동화책을 쓴다면 그때까지 노력한다고. 바르게 살려고도 노력하고. 착하고 씩씩한 사람 닮아가려고, 그럴려고도 노력할 거라고. 우리 함께 약속할래? 그런 다음에는 우리 그렇게 해서 만나자. 동화책에서도 만나고, 이 땅 어디에서라도 그렇게 만나자. 꼭 만나자 꼭."


'글이 곧 그 사람이다'고 했던가? 하지만 작가와 작품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 정말이지 글 잘 쓰고 말을 번지르르 잘하는 사람 중에 사기꾼들이 참 많다. 그런데 작가는 그 간격을 좁히려고 무던 애를 쓰는 사람 같다. 작품에 실린 열 편의 동화들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산재 · 정리해고 당한 아빠, 철거민촌에 살다가 노숙자로 전락한 아저씨, 통일 · 인권문제 등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해결해야할 현실문제를 어린이의 시각에서 숨김없이 제대로 그려내고 있다.

마치 어린이가 일기를 쓰는 듯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거나 사건을 묘사하는 데 있어 제약을 많이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끝까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솜씨에 감탄할 정도였다.


간혹 사회 현실을 다룬 동화들이 사실과 교훈 전달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작위적인 상황설정과 딱딱한 묘사로 인해 문학작품 수준에 미달하는 경우가 있다. 현실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동화도 희귀한 형편에 그런 작품을 대하면 안타깝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에는 그 문학성에 있어서도 평가 받을만하다고 본다.

열 편의 동화 가운데서 특히 내게 가장 가슴 찡하게 다가온 동화는 <독후감 숙제>였다. 콩나물을 길어다 파는 엄마를 둔 6학년 여자아이가 독후감 숙제를 해야하는 데 집에 읽을 책이 없다. 엄마 심부름으로 신문지를 주우러 나갔다가, 겉장이 찢어진 '작은 책'이라는 잡지를 발견하고는 거기에 나온 가슴아픈 만화 내용을 소재로 독후감을 쓴다는 이야기다. 알다시피, '작은 책'은 노동자들의 진솔한 글들을 모아 펴내는 잡지다. 거기에 실린 만화 이야기가 자기네 집 사정이랑 정말 똑 같다며 엄마에게 천연덕스레 소개하는 아이를 보면서 눈물이 나서 혼났다.

끝까지 이라크 어린이들과 함께 하려는 작가의 갸륵한 노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너무 고집부리지 말고 부디 무사히 귀환했으면 한다. 전쟁이 터진 마당에 이라크 현지에 들어간다고 해서 무슨 뾰쪽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니 살아서 평화를 위한 힘을 모으는 데 집중하길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박기범 이라크통신 (http://cafe.daum.net/gibumiraq)

덧붙이는 글 박기범 이라크통신 (http://cafe.daum.net/gibumiraq)

문제아

박기범 지음, 박경진 그림,
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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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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