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미 육군 장갑차들이 줄을 이어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로 진격하고 있다.로이터 뉴시스
미국의 대북강경책과 북한의 핵 시위로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부와 다수 언론은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전 지원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고 있지만, 이러한 기대는 '희망 사항'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이라크 침공과 동시에 백악관은 19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모든 선택 대안이 테이블에 있다"고 거듭 확인했고, 하워드 베이커 주일 미국대사는 19일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재처리 시설을 재가동할 경우 미국은 "최종적인 도발로 간주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이 13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언급한 것이 단순한 '립 서비스'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미국 안팎에서 강력한 비판이 일고 있듯이, 부시 행정부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의지가 있다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려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의 직접 대화 불가 방침을 밝히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다자주의'를 고집하면서 한반도 안팎의 전력 증강을 추구해왔다. 부시 대통령 자신의 화법대로라면, "말이 아닌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 당사자는 미국이라는 것이다.
북한, 심각한 위협 느끼고 있을 듯
작년 10월 핵파문이 불거진 이후, 줄곧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주장해온 북한은 미국이 북한과 대화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라크 침공을 강행함으로써 엄청난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한이 예전과 달리 미국의 이라크 침공 초기에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작년 10월 25일 외무성 담화를 통해 자신의 생존권과 자주권을 보장받는 방식으로, 협상과 억제력을 제시한 바 있는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다자간 협상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이라는 억제력 확보를 추진해야 할지 심각한 기로에 놓이게 됐다. 일단 북한이 다자간 협상을 수용하기에는 정치적 명분과 의제 및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북한이 쉽게 수용할 대안이 아니다.
핵문제가 불거진 이후 줄곧 북-미간의 사안이라며 미국과의 직접 담판을 요구해온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다자간 회담을 수용할 경우 협상력이 저하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미국이 다자간 회담을 제안하면서도 북미 양측의 의제를 모두 다루기보다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로 한정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의제의 편향성 역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하루하루가 아쉬운 북한으로서는 북미 직접 대화보다 다자간 회담이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결국 북한은 미국이 다자간 회담을 고집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시간 벌기'로 보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핵무장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같은 억제력 확보를 강행하기도 쉽지 않다. 비록 '현 단계'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자신의 핵 프로그램이 전적으로 전력 생산용이라고 주장해왔던 명분을 상실하게 된다.
더욱 중요하게는 핵무장이나 ICBM 개발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 억제력 확보 추진 과정에서 미국 주도의 제재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결국 이러한 북한의 향후 대응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북한 지도부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당 부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유엔의 승인 없이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화력과 최첨단 무기를 동원해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이 유엔의 대량살상무기 사찰 및 폐기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고집을 꺾지 않은 부시 행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 '대량살상무기' 위협 제거는 명분일 뿐 "악의 축" 국가들의 "정권 교체(regime change)"가 본질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게 될 것이다.
즉 북한 지도부는 길게는 탈냉전 이후, 짧게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의 본질은 북한 정권 붕괴에 있다는 인식이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보면서 더욱 강해질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사용후 연료봉 재처리 여부가 핵심 변수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북한에게 '핵카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도록 몰고 있다. 10월 25일 외무성 담화에서도 명확히 밝혔듯이, 또한 득과 실을 면밀히 따져봤을 때 북한이 원한 것은 결코 '핵무장'이 아니다.
핵카드는 클린턴 행정부 말기의 협상 성과를 무시하고 강경책으로 일관한 부시 행정부를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한 유력한 협상 카드인 것이다. 즉 북한이 원한 것은 핵, 미사일 등 미국의 이른바 안보 우려를 해소해주고 미국으로부터 주권 존중, 불가침 확약, 경제제재 해제 등 체제안전보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미 대화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강행함으로써, 북한으로서는 심각한 '핵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든 '협상 카드'의 성격으로 계속 남겨두어야 할지, 아니면 억제력 확보를 위해 핵무장을 추진해야 할지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즉, 부시 행정부의 일관된, 그리고 한층 강화된 대북 비타협주의는 북한으로 하여금 '원하지 않은 핵무장'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부시 행정부의 의도성 여부를 떠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대북강경책의 가장 파괴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의 향후 조치와 관련해 일단 초미의 관심사는 이른바 '금지선(red line)'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용후 연료봉의 재처리 여부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북미 협상 가능성이 더욱 낮아진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가 핵무장으로 '핵 전략'의 방향을 선택한다면, 이라크 전쟁을 핵무기라는 억제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적 기회라고 인식할 것이다.
위성 사진 등을 통해 볼 때도 북한이 재처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방사화학실험실로 불리는 재처리 시설 주변의 증기 시설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증기 시설은 사용후 연료봉을 녹이는 데 사용되는 화공 약품의 온도를 40-50도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
이와 관련해 미국 정보기관들은 북한이 재처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낙후된 기술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9일 미국 전현직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이 신문은 북한의 재처리 시설이 94년 제네바 합의 이전에 일부만 건설되었고 이후 건설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시험 가동'이 필요하고, 현대식 재처리는 원격통제장치로 이뤄지는 반면 북한은 수(手)작업으로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일반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북한이 대량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 못지 않게 기술적으로도 북한의 재처리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부시 행정부의 의도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부시 행정부의 의도가 무엇이냐에 있다. 2002년 1월말 이라크, 북한,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이들 국가로 "테러와의 전쟁"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암시를 던진 바 있는 부시 행정부가 기어코 이라크 침공을 강행함으로써 내부적으로 악의 축 국가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냐는 강한 우려를 낳고 있다.
이라크 정부가 유엔에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벌이고, 북한이 강력하게 협상을 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면서 한반도 전력증강을 꾀하고 있고, 점진적인 민주화 과정을 밟고 있는 이란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이러한 우려는 상당한 근거를 갖게 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불안감이 강할 수밖에 없는 북한과 이란은 "힘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이라크 점령을 단기간에 끝내면 부시 행정부는 외교력은 물론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한반도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된다. 가능성은 낮지만 제 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경우, 탈출구로 북한을 삼으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라크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영변 핵시설을 폭격할 수 있는 군사력을 이미 한반도 안팎에 배치해 놓은 상태이다.
키티호크보다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칼빈슨호, 레이더망을 피해 폭격을 단행할 수 있는 스텔스 전폭기 F-117 나이트호크 6대, B-1 B-52 폭격기 24대, 현존 최강의 전투기인 F-15E 20여대 등 최근 증강된 군사력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폭격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에 의한 평화"의 수준을 넘어 "무자비한 힘의 행사"를 통해 패권주의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오만함과 "군사주의"로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려하고 있는 북한의 무모함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위험한 게임은, 이제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운명은 주어진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라는 우리들의 결의도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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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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