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열사 초상화신성용
전북의 4.19는 여느 곳과는 다르다. 자신의 몸을 태워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의 숭고한 희생이 잠들어 있는 곳이며 그가 태어나고 주검을 당하기 몇 일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4.19혁명의 혼 김주열 열사는 역사의 그늘에 묻혀 이미 잊혀진 인물이 돼 가고 있다. 그는 1년 내내 아무도 찾지 않는 추모각을 혼자 지키다가 4.19를 생일처럼 맞고 있을 뿐이다. 4.19와 김주열 열사는 이미 사람들의 기억 밖에 있었다.
4.19를 40여일 앞두고 김주열 열사의 묘소를 찾았다.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산 6번지, 김주열 열사가 잠들어 있는 묘택의 주소이다. 남원에서 전남 곡성으로 가는 17번 국도를 타고 가다 금지면 소재지에 못 미처 우측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널따란 진입로와 광장은 시멘트로 포장이 돼 있고 묘소에 오르는 계단 우측 아래 추모각과 기념관이 나란히 서있다.
전통 한옥 기와집 양식인 팔작지붕 형태의 추모각과 기념관은 지붕 기와를 제외한 나머지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져 왠지 어색하다. 외벽에 칠해진 흰색 페인트도 빛이 바랜 지 오래돼 보인다. 두 건물은 담장이 둘러 싸여 있고 같은 뜰에 있지만 대문은 각각 나있다.
먼저 묵념이라도 올려야 될 것 같아 추모각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 떨어졌는지 잠긴 열쇠가 달린 문고리가 떨어져 나와 문턱에 걸쳐 있고 대문의 나무 쪽판도 뒤틀려 있다.
투명유리 문으로 만들어진 추모각은 안이 훤하게 보였다. 영정 앞에 제단이 놓여졌고 그 앞에 촛대와 향로가 보인다. 그리고 좌측 벽에는 김주열 열사의 초상화가 걸렸다.
촛대와 향로는 격식을 갖추지 않고 청소할 때 물건을 정리한 것처럼 나란하게 정렬돼 있다. 촛대에 서있는 두툼한 양초는 지난해 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했던 듯 몸이 크게 휘고 비틀려 있다. 향로 역시 텅 빈 채 깨끗하게 씻어져 있고 피울 향도 보이지 않는다. 추모각 안에는 향내음조차 사라진지 오래였다.
무엇인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갑작스런 현기증을 가라앉히고 김주열 열사의 흔적이라고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옆 기념관으로 발을 옮겼다.
문이 잠겨 있다. 경비업체의 경고등에 붙어 있고 문 옆에 관람희망자에게 연락하라는 남원시청과 금지면사무소 전화번호가 보인다.
면사무소 담당자를 기다리는 동안 추모각과 기념관 주변을 둘러봤다. 추모각은 지반이 내려앉는지 돌판으로 미장한 토방의 돌판과 건물 사이에 틈새가 보인다. 토방도 상당하게 내려앉아 있다.
돌판으로 포장한 뜰은 배수가 되지 않았는지 담장 쪽에 돌판 사이로 죽은 이끼가 검버섯같이 자리하고 돌 포장위로 물 고인 자리가 났다. 지난 겨울 추위에 시달린 잡초들도 듬성듬성 담장을 에워싸고 있다. 담장밖에는 쓰레기 더미도 보인다.
5분여가 지났을까 금지면 직원이 문을 열어 준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최류탄이 얼굴에 박힌채 물에 떠있는 김주열사의 주검을 찍은 사진이 정면에서 우리를 나무라듯 등짝에 소름을 꽂는다.
그의 손때가 묻어 있을 학용품이며 학적부, 식기, 책상, 책장, 필기구 등에서 체취가 풍기는 듯하다. 김주열 열사의 참혹한 주검을 알리는 그 당시 신문 기사들은 뜨거운 함성을 전한다.
졸업대장 틈에 보이는 중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온순한 성격이며 협동심이 강하고 준법성이 풍부하여 타의 모범적인 행동을 함'이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이처럼 밝고 순수한 소년을 누가 죽음을 몰았냐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김주열 열사의 기념관은 방치됐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금지면사무소가 관리를 맡고 있지만 관리에 소요되는 예산은 단 한 푼도 없다.
겨우 공익근무요원을 동원해 가끔 청소를 하는 것이 관리의 전부이다. 관리인 고용은커녕 얼마 전에는 전기요금을 내야하는 주체를 놓고 서로 미루기까지 했다는 말에 씁쓸하다 못해 서글펐다. 기념관에 열쇠를 채워야하는 이유이다.
참배객도 거의 없다. 한 달에 한, 두 번이 고작이다. 그것도 인근 학생들의 단체 관람이 전부라고 한다. 예전에 자주 모습을 보였던 재야인사들의 발길도 거의 끊어진 상태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묘소에 올랐다.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 세운 비석과 나란히 묘 오른 편에 서있는 비석은 64년에 세운 것이다. 당시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 박사가 쓴 "군의 충과 의는 일월보다 밝고 산해보다 크며 그 장렬한 항쟁은 길이 청사에 빛날 것"라는 비문은 우리를 무색하게 만든다.
상석 앞에 어느 추모객이 열사에게 술잔을 올린 듯 빈 소주병이 향로대에 힘겹게 몸을 기대고 있다.
| | 4.19와 김주열 열사 | | | |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 200여미터 떨어진 수면 위로 괴이한 모양의 시체가 떠올랐다. 교복차림의 10대 소년이 오른쪽 눈 위에 최류탄이 박힌 채 떠오른 것이다. 시체를 낚아 올린 시민이 이를 부두 위에 올려놓자 누군가의 입에서 "김주열이다"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주열을 금방 알아본 것은 그의 어머니의 애타는 호소 때문이었다. 김주열은 그 해 봄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르러 왔다 3.15시위에 참가한 뒤 실종됐던 것이다. 그의 행방이 묘연하자 그의 어머니는 실성한 듯 아들을 찾아 헤맸고 그러는 사이 '김주열 미스테리'는 마산시민의 머리 속에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김주열의 처참한 시체가 발견되자 격분한 시민들은 성난 물결을 이루며 데모에 들어갔다. 경찰이 시신을 도립병원 안치시키자 시신 인도를 요구하는 3,000여 시민·학생들이 경찰서를 포위했다. 이렇게 시작된 2차 마산봉기는 연일 계속돼 4.18 고대 학생데모,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김주열 열사는 1944년 10월 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931번지에서 태어났다. 4남2녀 가운데 넷째로 형과 누나 둘 다음이다. 금지동초등학교와 금지중학교를 졸업했으며 남원농고에 입학했다가 다시 마산상고에 입학한 것은 외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 | | | |
덧붙이는 글 | 시사전북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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