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의 기준을 마구 흔들어라!

유시민 논쟁을 바라보며 든 몇 가지 생각

등록 2003.05.01 15:22수정 2003.05.0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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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종호
내가 귀를 뚫은 것은 1997년이다. 요즘에야 교회나 선교단체, 심지어 고등학교에서도 귀를 뚫은 남자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교회에서 귀를 뚫은 남자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귀를 뚫고 처음 교회에 간 날, 난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저항(?)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님은 물론 친구들마저 교회에서 귀걸이를 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는다는 권면을 해주었다. 귀걸이에 대한 논란은 점잖은 권고로 끝나지는 않았다. 아들 귀에 걸린 귀걸이를 떼 달라는 담임목사님의 권유가 부모님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귀를 뚫은 이유는 간단했다. 귀걸이를 하는 것이 멋있고 예전부터 귀걸이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가르치던 공부방 아이들과 문화 코드를 공유하고 싶은 욕심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저 귀걸이가 좋기 때문이었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신앙과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귀걸이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앙적인 이유를 들어 귀걸이가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통념을 깨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인지,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제한된 것인지, 특히 그 제한이 교회 안에서는 얼마나 엄격하고 강한 것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귀를 뚫는 것은 신앙과 아무런 관계 없는 개인의 취향이라는 나의 상식은, 타인의 시선을 존중하는 신사들에게는 그저 '튀기'를 바라는 철없는 행동으로 비쳐졌다.

지금은 귀걸이를 하지 않는다. 이젠 귀걸이를 하는 것에 흥취를 잃었기 때문이다. 대신 수염을 기르고 개량한복을 자주 입고 다닌다. 이 역시 별 다른 이유는 없다. 편하고 좋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차림이 일반적인 기자상(象)과는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취재를 다닐 때 느끼는 따가운 시선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시선에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중이다. 기자로서의 나의 능력은 기사로 판단되는 것이지 나의 옷차림과 기자 생활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시민 의원의 옷차림을 두고 국회가 시끄럽다. 유시민의 캐주얼 복장을 못마땅하게 여긴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집단 퇴장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참 놀라운 일이다.

상가집에 반바지를 입고 간 것도 아니고 결혼식에 야구 잠바를 입고 간 것도 아니다. 국회에 캐주얼 차림을 한 것일 뿐인데,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렇게 고까웠나보다. 그들은 '국민 앞에서 예의를 갖추라'고 유시민 의원에게 호통을 쳤다.


예의를 정하는 기준은 사실, 유동적인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남자들의 귀걸이가 이제는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한 것처럼, '예의 있다'와 '예의 없다'를 가르는 기준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과거의 기준과 새로운 기준의 충돌은 그러므로 끊이지 않고 발생할 것이다. 그 긴장의 지점에서 먼저 벽을 깬 사람에게 비난과 오해가 쏟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유시민 의원의 옷차림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반발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떠올랐다. 바리새인의 특징은 "중요하지 않은 기준을 진리로 삼고 다른 사람들을 재단한다"는 것이었다.

국회의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의정 활동을 성실히 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자신에게 주어진 신성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욕설과 폭력, 나태함과 안일로 국회를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캐주얼을 입은 유시민에게 "국민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희극이다.

입고 싶은 옷 마음대로 입고, 하고 싶은 머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하루 속히 도래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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