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침대의 행복한 말로(末路)

<아이야, 너흰 우리의 희망이란다 4>

등록 2003.05.05 16:51수정 2003.05.0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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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국

"누가 이걸 내다 버렸노."
"쓰레기차가 연휴 끝나면 가져가겠지."
"그래도 사람들 많이 다니는 골목인데 쓰레기 두는 곳에 가져다 놓지."


이사를 했는지, 새로 침대를 샀는지 그동안 사용했던 오래된 침대를 누군가 골목길 입구에 버렸습니다. 쓸모 다한 물건의 말로(末路)가 그렇듯 사람들의 구박을 받으며 골목길에 버려져 있는 침대의 모습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차라리 쓰레기 모아두는 곳에 있었으면 곱게 실려 갔을 터인데 눈치도 없이 사람들 오가는 곳에 자리를 잡고서 주인까지 욕을 먹이는 꼴이란. 버려진 침대나 버린 주인이나 같은 취급을 받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침대가 그곳에 자리를 잡은 지 이튿날 갑자기 한 무더기 아이들의 "꺄르륵"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거의 자지러질 듯한 웃음소리에 뭐가 그렇게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도 아이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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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국

아이들을 기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동네 사람들의 구박덩어리였던 버려진 침대였습니다. 아이들은 침대 위를 뛰며 신나게 놀고 있었습니다. 아예 침대 받침대는 미끄럼틀이 되어 있었고 침대 위에서 구르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한가한 일요일 아침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진, 노는 것도 아이들마다 제각각입니다. 구경하는 아이, 잃어버린 신발짝을 찾는 아이,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려다 사진 찍는 저를 발견하고 V자를 그리는 아이, 연방 미끄럼을 타며 웃는 아이, 맨 오른쪽 친구는 뛰어내려 안전하게 착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맨 오른쪽 아이는 앞구르기를 하려고 하는데 틈이 보이질 않네요.


두 번째 사진, 부시시한 얼굴로 한동안 아이들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아저씨에게 기념사진을 찍혔습니다. 분홍색 줄무늬 반팔옷을 입은 여자 아이가 옆으로 곧게 팔을 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앞구르기를 할 때 팔을 곧게 펴고 '체육'이라는 구령을 붙인답니다. 그 와중에도 뒤에서 먹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도 있네요.

제 눈에는 지저분한 버려진 침대였지만, 아이들에겐 아주 멋진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침대도 아마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웠겠지요. 이젠 쓸모가 없어 골목길에 버려진 신세가 되었지만, 잠시나마 우리동네 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니 버려진 물건의 '말로'치곤 아주 행복했을 겁니다.


버려진 사물 하나를 보는 것에도 어른과 아이는 그렇게 달랐습니다. 가끔은 눈높이를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우리동네 골목길 '버려진 침대의 행복한 말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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