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스트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소피스트 운동>이라는 책을 통하여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물음을 받는 사람은 대뜸 우리의 통상적 관념에 따라 ‘궤변론자’를 떠올릴 것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궤변론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꾸며대고, 속임수로 그럴싸한 거짓 추론을 하는 사람’이다.
이 규정에는 어디 한 구석 긍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과연 ‘소피스트들’은 철학사적 맥락에서 실제로 그만한 욕을 얻어먹을 일들을 행하고, 나아가 억지와 거짓을 일삼던 부도덕한 자들로 철학사에 기록되어야 하는 철학자들인가? 그렇다면 부도덕한 자들이 굳이 철학사라는 족보에 남아 있어야 할 정당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소피스트들’의 이미지가 부정적이어야 할 그 어떤 정당성이 정말로 있긴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그 부정적 이미지의 원천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 놓은 사람은 바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서양 철학사의 거봉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소피스테스> 221C 아래에서 ‘소피스트들’이 가지는 이미지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부정적 방식으로 강력하게 심어 놓았다.
(1) 부유한 젊은이를 사냥하는 고용된 사냥꾼. (2) 덕을 파는 사람. (3) 배움을 파는 사람으로서 소매꾼. (4) 고객들을 위해 스스로 생산한 상품들을 파는 사람. (5) 돈을 버는 쟁론술(Eristike)이라는 논쟁을 수행하는 사람. (6) 논박술(Elenchos)을 전개하는 사람. (7) 알지 못하면서 실재보다 현상과 의견에 근거를 둔 모순을 만들어 내는 철학의 거짓된 야바위꾼.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 부정적 이미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궤변술(sophistike. 즉 ‘소피스트적 기술 내지는 지식’)은 외견상으로는 지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또 소피스트는 외견상으로는 지혜와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지혜에 의해서 돈을 버는 자이다.”(<소피스트적 논박>, 김재홍 옮김, 165a22-24)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우리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음영(陰影)에 짓눌려 있는 한, 누가 이들의 설명을 넘어 ‘소피스트들’의 철학사적-역사적 의미를 ‘복권’시킬 수 있었겠는가? 소크라테스 당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온 그 부정적 이미지는 ‘소피스트들은 진지한 사상가들이 아니었으며 철학사에서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과, 둘째로 그들은 철저하게 부도덕했다는 것’(16쪽)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 평가와 달리 ‘소피스트들의 운동’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헤겔이었다. 헤겔은 그의 <철학사 강의>에서 자신의 도식적 설명 방식에 따라 철학사를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종합’의 과정을 거처 전개되는 절대 정신의 자기운동으로 파악했다.
즉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정립의 단계라면, 소크라테스, 소피스트 그리고 소-소크라테스 학파의 입장들은 주관성의 원칙이 첫 번째 입장에 대해 반정립되는 것이고, 이 두 입장은 지향되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종합된다는 것이다.
헤겔의 이 도식적 평가를 통하여 소피스트들은 철학사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헤겔 이후 19세기 영국의 역사가였던 크로트(G. Grote)는 또 다른 시각에서 소피스트들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이후에도 첼러를 비롯한 고전 철학자들이 이 방면에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면서 소피스트 운동을 재평가하는 계기를 가져오고, 오늘날에도 여러 방면에서 소피스트들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커퍼드의 <소피스트 운동; The sophistic movement, Cambridge University, 1981>은 이러한 최근의 연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는 저서이다.
그는 지난 2500년을 지배해 왔던 소피스트들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단편으로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꼼꼼히 재구성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이런 꼼꼼한 문헌 작업은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의 입장을 재구성하는 데서 특히 빛을 발하여 소피스트들은 이 책에서 거의 본격적 철학자로 자림매김할 수 있을 정도로 다시 평가받기에 이른다(역자 후기, 292-293쪽 참고).
이 책을 읽을만한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을까? 소피스트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아테네가 가장 번영을 누린 시기였다. 또한 지적, 예술적 활동이 활발했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에 사회적-정치적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던 시기였다. 삶과 체험에 대한 기존의 양식들은 새로운 흐름에 의하여 ‘해체되고’ 있었고, 예전의 ‘신념들과 가치들’은 공격받고 있었다. ‘소피스트 운동’은 당시의 이 모든 현상을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철학자, 정치가, 소피스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운동 경기를 즐기듯, 모두가 쟁론적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토론하였던 모양이다. 그들이 직면했던 여러 가지의 사회적, 정치적인 사실적 문제들 뿐 아니라, 산술적 문제를 포함하는 지적인 문제까지도 쟁론술(eristike)을 통해서 그 해답을 구하였다.
그들이 즐겼던 쟁론술은 일종의 지적인 승부를 걸고 승자와 패자를 분명히 했으며, 또한 그것은 명예와 정치적 출세를 할 수 있는 매개적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인 수사학, 논리학과 같은 교육을 원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랐던 사람들이 바로 소피스트들이다.
소피스트들이 자신들의 학설을 통하여 공식화하고 논의했던 문제들이 얼마나 현대적인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사뭇 놀라운 바가 있다. 소피스트들이 제시했던 철학적 문제들, 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문제의식과 현대의 우리의 문제의식과의 유사성 및 ‘코드’의 일치는 우리가 빠뜨리지 않고 이 책을 통하여 찾아내야 할 철학적 과제이다.
(1) 인식론과 지각 이론에서의 철학적 문제들. 감각 지각의 확고성의 정도. 진리의 본성. 현상과 실재의 관계. 언어와 사고와 실재의 관계의 문제.
(2) 우리의 앎이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진다는 지식의 사회학적 문제. 소피스트들은 ‘진보’에 대한 신념과 인류 역사가 펼쳐지는 ‘발전의 믿음’을 옹호하고 모든 것이 오래 전이 나았다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이 길을 열었다.
(3) 신들에 대한 지식의 획득이라는 문제. 신은 우리 마음에만 존재하거나, 단지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필요했던 ‘인간의 발명품’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4) 사회에서 공동생활의 이론적 실천적 문제,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은 어떤 점에서는 평등하거나 평등해야만 한다는 ‘민주정’에서의 이론적, 실천적 문제.
(5) ‘정의’는 무엇인가?
(6) 교육의 본성과 목적, 사회에서 교사들이 하는 역할. ‘덕’이 가르쳐질 수 있다는 학설에 포함된 함의들. 무엇이 가르쳐 질 수 있으며, 누구에 의하여, 누구에게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느냐는 물음의 전개. 이를 통하여 모든 영역에서 상대주의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과 인간의 삶 전체에서 사리에 맞는 논증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없다는 믿음.
위에서 소피스트들이 제시한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문제 삼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소피스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에 대한 생각을 비롯하여, 민주정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신념, ‘진보와 발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 ‘교육에 관한 근본적 반성’ 등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질문들이다. 소피스트들의 이러한 물음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역사적으로 ‘궤변’이라는 레테르가 얼마나 부당하고 적절하지 않은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옮긴이인 김남두 교수(서울대 철학과)는 이 점에 관련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소피스트 운동이나 그들의 상상에 대한 평가 및 해석의 역사는 그들에 대한 최근의 활발한 연구가 소피스트들이 활동했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여러 면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촉진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진리의 합의설, 사회 계약설, 윤리적 및 인식론적 상대주의 입장 등은 바로 오늘날 강력한 조류로서 철학적 논쟁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이 같은 입장들을 규정하는 제반 정치 사회적 조건들이 당시의 그것과 적지 않은 유사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소피스트 운동이나 그 사상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2500년 전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바로 오늘의 인간 삶의 제 조건들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것은 ‘모든 역사는 본질적으로 당대의 역사’라는 크로체의 언명을 되새기게 한다.”(294-295쪽)
옮긴이의 적절한 지적처럼, “소피스트 운동이나 그 사상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2500년 전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바로 오늘의 인간 삶의 제 조건들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면, 그간 ‘주류적 철학사’가 ‘소피스트 운동’을 변방으로 밀어내고 그 철학적 함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오해의 역사’를 다시금 원래의 제자리 되돌리려는 건실한 철학자들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가 바로 오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철학사가 ‘오해의 역사’가 아니라, ‘오해를 푸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두 번 다시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소피스트 운동
조지 커퍼드 지음, 김남두 옮김,
아카넷,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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