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의 회귀 vs 인간의 회귀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

등록 2003.05.14 12:00수정 2003.05.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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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 자신의 삶에 후회나 아쉬움 없이 눈을 감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다양하고 복잡한 사건과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진실과 자신을 잃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인에게 윤대녕은 단편〈은어낚시통신〉에 나타난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 인간의 존재적 근원과 삶의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만남이란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것이며, 모든 것은 역동적이므로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서로의 고리를 물은 순환적 반복으로 이루어지기에 ‘내’가 ‘타인’이며 ‘타인’속에 ‘내’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회귀성인 은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이상적인 삶으로 회귀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30대의 한 남자는 우연히 ‘은어낚시통신’이란 우편물을 받게 되며, 그 모임의 초대를 받는다. 그 후, 그 모임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 모임에 합류하여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 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런 과정으로 이끄는 것은 두 여자에 의해서이다. 남자에게 전화를 걸고, 빨간색 스포츠카에 태워 모임의 장소로 안내하는 역할의 한 여자와 옛 사랑의 한 여자이다. 여기서 첫 번째 문제점이 주인공의 자발적인 의지나 어떤 본능이 아니라 보조적인 여자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인식과 회귀인 것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이 두 여자의 모습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불분명해서 살아있는 여자들이란 느낌이 아니라 몽환적이고 사람의 모습을 한 영혼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는 윤대녕의 소설이 자주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남자가 주인공이고 사건을 매개하고 남자를 이끄는 것은 여자로 고정시키는 구성을 사용한다. 또 남자는 그러한 여자들과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나누거나 심리적 치료를 받기도 하고 혼돈에 빠지는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해 작가는 가장 어려운 존재가 여자로 도통 이해 불가능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신작 장편〈미란〉에서는‘미란’이란 여자를 그려냄에 있어 밝고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전작의 여자들과는 차별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작의 여자에 대해 진일보했다는 평가가 다수인 걸 보면 작가는 독자의 비판을 받아들여 그에 대응한 노력에 긍정적인 박수를 보내야한다.

은어는 벚꽃이 필 무렵,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가을에 제가 태어난 하구로 돌아가 알을 낳고 죽는다. 이렇듯 은어가 회귀하는 것은 본능에 의해서이다. 가장 중요한 번식의 본능으로 은어의 일생의 대부분을 살고 그를 위해 회귀하게 된다.

이와 비교해 남자 주인공은 주위의 도움을 통해 회귀하게 되며 그 모임의 사람들 또한 저마다 이유가 다르게 모여 은밀하게 모임을 키워 나간 것이고, 그러다 두 겹의 삶을 사는 부락을 세워 삶의 방식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런 본능이라기보다는 이성이 개입된 인간의 의도 하에 초래된 결과로써의 회귀이다.

한편 은어는 강, 바다 등 회귀하는 장소가 명백히 정해져 있으나 주인공과 우리가 회귀해야 할 그 곳은 어딘지,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은어의 회귀성은 인간 회귀의 필요성 제기에는 훌륭한 효과를 보여 주고 있지만 은어를 기반으로 우리 삶의 회귀성의 불가피함을 결부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은어낚시통신〉을 읽다보면 스크린에 한 영화가 펼쳐진다. 그의 감각적인 문체와 시각적인 묘사기법 때문일 것이다. 그 내용 묘사에 있어서도 "마치 이미 영화가 시작된 극장에 들어섰을 때처럼-銀魚", "영화 「베티 블루 37°2 」의 여주인공 베아트리스 달의 얼굴을 훔친 듯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도...(중략) 스크린만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은어낚시통신" 등 이렇게 영화가 자주 등장한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광화문이나 신촌, 홍대의 지명이나 까페, 음식점의 실명이 그 현장에서 주인공의 연기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함으로써 더욱 독립단편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이를 통해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매체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다소 흥미가 반감되는 소설을 영화화하는 방법으로 새롭게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런 면이 그의 소설이 90년대 모더니스트 독자들을 대중적으로 매료시키는 힘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은어의 회귀와 인간의 회귀에는 그 차이점이 존재할지라도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회귀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를 위해 자신의 존재론적 특성을 깨닫고 회귀를 시도해 보려 한다. 말하자면 이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가 드러난다 할 수 있다.

아무런 사상이나 깨달음을 주지 못한 채 재미만을 추구해 독자를 유혹하려는 상업소설에 비해 이 소설은 독자 또한 그 가치를 알아 대중적으로 많이 읽히고 그에 따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은어낚시통신〉을 시작으로 작가는 그 동안 3권의 중·단편 소설집과 6권의 장편소설, 1권의 산문집 등 꾸준한 활동을 해 왔다. 그리고 큰 비판의 난관과 독자의 외면이 아닌 소설계의 긍정적 배려와 든든한 윤대녕 독자군의 지지 아래 계속된 활동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확고한 작가의식을 바탕으로 작품세계 구축을 위한 작가 스스로의 노력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94년〈은어낚시통신〉이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의 그 신선함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믿는다.

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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