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지묘, 봉분 아래 시멘트 축대 부분이 허물어져서 안타까웠다.박도
윤동주의 무덤
윤동주의 생가, 모교를 보았다면 다음은 그분이 영원히 잠든 곳, 무덤을 찾는 일이었다.
다행히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조선족 허 기사는 지난해 윤동주 무덤을 가본 적이 있다고 장담하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낯선 이국땅에서 유적지를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안내인을 잘 만나야 한다. 허 기사는 성품이 상냥하고 밝았다.
명동소학교에서 다시 용정으로 방향을 되돌렸다. 몇 차례 차를 세우고 길가에서 현지 주민에게 물은 끝에 용정현 뒷동산에 있는 중앙교회 묘역을 찾았다.
산은 야트막했다. 날씨가 쾌청한 탓에 승용차로 산길을 오를 수 있었다. 만일 비라도 조금 내렸다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진흙길이었다.
“선생님들, 오늘 참 재수 좋은 날이에요.”
허 기사는 날씨 좋은 걸 자신 탓인 양 마구 생색을 내었다.
그는 묘소를 쉬이 참배하게 된 걸 날씨와 자기 탓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출발 전, 그 날 승용차 삯과 봉사료로 500원으로 계약한 바, 봉오동 전적지를 찾으면 100원, 윤동주 묘지를 오르면 100원을 덤으로 주기로 했기에 그가 나보다 더 기뻐했다.
아무튼 그를 잘 만났다. 답사 여행 중, 안내원이 길을 몰라 헤매면 길바닥에서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기 십상이다.
산을 오르자 올망졸망한 무덤들이 즐비했다. 모두 고만고만한 무덤들로 수천 개는 넘을 듯했다.
마침 산등성이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 농부에게 윤동주 묘소를 물었더니 친절히 가르쳐 줘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 농부도 조선족이었다.
나는 위대한 시인 무덤 앞에 한참동안 깊이 고개 숙여 엎드렸다. 윤동주 묘지의 봉분은 다른 묘보다 조금 더 컸고, 봉분 아래 부분은 시멘트로 둘러 발라 얼른 눈에 띄었다.
오석(烏石)으로 된 상석 뒤에는 같은 재질로 쓴 묘비가 1미터 정도 높이인데, 앞면은 다시 파서 양각으로 “詩人 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지묘)라고 새겼다.
묘비 뒷면과 좌우 면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詩人 尹東柱之墓
嗚呼故詩人尹君東柱其先世坡平尹氏人也童年畢業於明東小學反和龍縣立第一校高等科嗣入龍井恩眞中學修三年之業轉學平壤崇實中學閱一歲之功復回龍井竟以優等卒業于光明學園中學部一九三八年升入京延禧專門學校文科越四年冬卒業功已告成志猶未已復於翌年四月負笈東渡在京都同志社大學部認眞琢磨詎意學海生波身失自由將雪螢之生涯化籠鳥之環境加之二竪不仁以一九四五年二月十六日長逝時年二十九材可用於當世詩將嗚於社會乃春風無情花而不實吁可惜也君夏鉉長老之令孫永錫先生之肖子敏而好學尤好新詩作品頗多其筆名童舟云
一九四五年 六月 十四日
海史 金錫觀 撰竝書
弟 一柱
光柱 謹竪
이 묘비명을 우리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시인 윤동주의 무덤
아! 슬프다. 시인 고 윤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린 시절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일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다시 용정의 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으로 전학하였다.
학업을 닦느라 그곳에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1938년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하였다. 공부는 이미 성공의 경지에 이뤘어도 그 뜻이 오히려 남아서 이듬해 4월에는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동지사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형설의 학업 생활은 변하여 새장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게다가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였으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의 사람됨은 오늘의 세상에 큰 인물이 됨 직했고, 그의 시는 비로소 사회에 울려 퍼질 만했는데 봄바람은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 하였나니 아아, 애석하도다.
그는 하현 장로의 손자이며 영석 선생의 아들로서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겨 하며 시를 좋아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은 동주라 했다.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이 묘비명은 윤동주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운 것으로 그때에는 부모가 모두 살아있을 때였다.
이 비문을 짓고 쓴 분은 명동소학교 학감 김석관으로, 김약연 목사의 뒤를 이어 명동학교 교장이 된 김정규의 아들이다.
그래서 윤동주 연혁 기술이 비교적 정확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어린 시절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일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함은 당시 대립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때의 추억이 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에서 나오는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을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고 노래한 부분 중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은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 썼을 것이다.
묘지는 사방이 훤히 트인, 남향받이로 팔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고즈넉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