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소중한 것 여섯 가지를 종이에 적어 넣고 그 중에서 덜 소중한 것을 하나씩 지워 가는 놀이랄까, 집단 상담 같은 것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자못 심각한 아이들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마음속으로만 소중한 것 여섯 가지를 이렇게 적어보았습니다.
가족, 하나님, 시, 아이들, 산책, 책
이 중에서 덜 중요한 것으로 책을 먼저 골랐습니다. 평생 책을 읽지 않는 조건으로 500억을 준다면 그 돈을 사양할 수밖에 없노라고 아이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속이 많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산책을 탈락시켰습니다. 남편도 아버지도 교사도 아닌, 순수 자연인으로서의 내 자신과 맞닥뜨릴 수 있는 그 고요한 시간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음으로 저는 시와 하나님을 지웠습니다. 시는 제가 스스로 지웠고, 하나님은 당신이 손수 지워주셨습니다. 귓가에 이런 말이 스쳐지나간 듯 했습니다.
"어린 소자를 대접한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이니라" 이제 남은 것은 가족과 학교 아이들. 승부가 뻔한 게임이었습니다. 남은 둘을 가지고 망설이고 말고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가족에 대한 신성모독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족이 아닌 아이들을 선택했습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수업시간에 한 아이가 손장난을 하고 있기에 주의를 주었더니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주어야겠다는 이성적인 마음도 작용하여 수업이 끝나자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는데 처음과는 달리 조금은 유순한 태도를 보이던 그 아이의 입에서 이런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선생님 눈은 그 애를 바라볼 때만 빛나는 것 같아요."
교사의 기쁨은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던가요? 제가 편애하던 아이는 재능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문학과 음악, 그리고 영어에 관심이 많은 아이여서 그것을 키워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차별대우를 한 적은 정녕코 없었습니다. 그 아이도 그것만은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문제는 눈빛이었습니다. 평범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빛나지 않았던 그 눈빛.
장담할 일은 못되나, 저는 지금 아이들을 편애하지 않는 편입니다. 가끔 아이들에게 그것을 확인해 볼 때도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 중에 혹시 편애하는 학생이 있습니까?" 다행히도 아이들의 대답은 긍정적입니다. 한 아이만을 편애하지 않기 위해서, 그로 인해 더 많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교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편애를 하지 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애가 문제라면 한 아이에게 주었던 눈길을 거두면 되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모든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눈이 빛날 수 있기를 저는 간절히 바랬습니다.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을 이름으로 불러주고, 2초 동안 서로 눈을 맞추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사랑스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들만의 생명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제 눈이 빛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즘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생명다발'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제가 손수 낳은 아들보다 덜 귀하게 느껴진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식이 아니라고 소홀히 하는 것은 신이 주신 교사의 직분을 함부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바로 제 일인 것입니다. 일은 곧 그 사람의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껍질뿐인 실패한 아버지를 아들아이도 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있는 아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아들보다도 학교 아이들을 선택한 사실에 대하여 그 진실여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합니다. 가족을 소재로 한 감동적인 영화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천하를 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는 아들과 학교에서 직업적으로 만나는 아이들의 가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요, 딸들인 것입니다. 각자의 부모들에게는 모두 하나 같이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여 있으니 제 눈에 생명다발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의 동일한 생명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면서 오로지 성적만으로 아이들의 생명 값을 매기려는 우리 교육의 야만과 무지에 대해서도 눈이 떠졌습니다. 아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은 꿈의 성취를 위해 아이들을 수단으로 삼아온 것은 아닌가 싶어 제 자신부터 뉘우침이 왔습니다. 그 뉘우침으로 아이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스승의 날을 지나면서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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