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마운흔 듀’ 마시며 ‘이롸릭 무비’ 봐야하나

[서향만당 23] <미국 영어발음 무작정 따라하기>를 보고 늘어놓은 푸념

등록 2003.05.23 13:00수정 2003.05.2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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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이 미국화를 세계화로 착각할 때가 있었다. 할 일 많다는 넓은 세계로 진출하기 위한 외국어 능력 하나쯤은 필수로 인식되면서 너도 나도 외국어 학습 열차에 올라탔다.

a 저자 릭킴(왼쪽)과 오경은. 그들은 교보, 영풍 등 서울 대형서점 100주 연속 베스트셀러 영어책을 썼다. 그러나 밀려드는 이 이상한 기분은 무얼까?

저자 릭킴(왼쪽)과 오경은. 그들은 교보, 영풍 등 서울 대형서점 100주 연속 베스트셀러 영어책을 썼다. 그러나 밀려드는 이 이상한 기분은 무얼까? ⓒ 길벗 이지톡

패션을 배우려면 이탈리아나 프랑스로, 금융을 배우려면 미국이나 영국으로 떠나는 것처럼 외국어, 특히 영어를 배우기 위한 사람들은 미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나 미국으로 갈 수는 없는 법. 경제 사정이나 현지 여건을 고려해 영국이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떠나는 이들도 적잖았고,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외국으로 나가야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미국 영어발음을 무작정 따라하다

작년 한 해만도 어학 연수자 수가 18만1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누구나 아무 걱정 없이 외국으로 떠날 수 있는 형편은 아닐 것이다. 돈도 문제고 시간도 문제니 말이다. 국내에서 학원을 다니고 싶어도 다달이 몇 십만 원 하는 비용, 학생 신분에 여간 비싼 게 아니다. 물론 투자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다녀도 될 테지만 그 정도의 시간과 비용을 들일 만큼 매력적인지 미지수였다. 그래서 찾은 것이 일단 책과 테이프였다.

길벗 이지토크에서 나온 <미국 영어발음 무작정 따라하기>. 일단 제목부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소 선정적인 제목이기는 하지만 문법이나 독해보다는 대화 능력이 절실했는데 특히 발음이 문제였다. 이른바 ‘된장 발음’.

책을 펼쳐들고 미국 영어발음 공부를 시작했다. 틈틈이 책에 딸려 있는 테이프도 들었다. 이전에는 그냥 넘어갔던 동사와 명사들의 원래(라고 주장하는) 발음들이 낯설지만 왜 그렇게 흥미로운 건지, 재미도 재미지만 영어발음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는 듯했다.


음료 ‘마운틴 듀’가 아니라 ‘마운흔 듀’, ‘에로틱 무비’가 아니라 ‘이롸릭 무비’. 또 ‘라디오’가 아니라 ‘뤠이리오우’. 책에 나온 대로 발음해 보니 이전에 봤던 영화들에서 배우들이 이런 발음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미국식 영어’만 영어인가?


그런데 난데없이 밀려든 이 자괴감은 무얼까? 책 반절이 넘어가면서 “이걸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몇 개는 몰라도 외국어 하나쯤 익혀 두는 게 필요할 테지만 “꼭 이런 공부를 해야만 하는 걸까?” 하는 기분, 참 복잡했다.

a 릭 킴, 오경은 / 미국 영어발음 무작정 따라하기 / 길벗 이지톡 / 2001

릭 킴, 오경은 / 미국 영어발음 무작정 따라하기 / 길벗 이지톡 / 2001 ⓒ 길벗 이지톡

물론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이 갖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국내에서 영어 공부한 것만 가지고 외국에 나가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벌써부터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성문>으로 대표되는 문법과 독해 교육에 치중하다보니 자연히 대화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 영어발음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은 과연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영어를 배워 영국으로 갈 사람도 있을 것이요, 필리핀 혹은 말레이시아에 갈 이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런 곳에서 미국 영어발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을까? 그런 나라로 이민 혹은 유학 등을 떠날 이라면 그네들 식의 영어를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 영어발음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심지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영어 발음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시당하기도 한다. 마치 이전에 서울이나 방송, 신문 등 ‘중앙’에서 ‘지방’ 사투리를 쓰는 이들을 폄하했던 것처럼 말이다.

본디 언어를 배우는 목적이란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결국은 커뮤니케이션,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전남대 교수 미즈노 순페이(水野俊平). 전남에서 활동하는 그가 그 지역 사투리를 구사함으로써 지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타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지역민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비단 필자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영어 발음, 특히 미국 영어발음을 익혀야 하는 걸까? 너무 미국 영어발음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그저 맘 편하게 미국 영어가 자의든 타의든 국제 표준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학습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

왜 이 글을 썼냐고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잘 모르겠다. 그냥 영어 못하는 이의 푸념 혹은 변명쯤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래, 이건 된장의 푸념일지도 모른다.

미국 영어발음 무작정 따라하기

오경은 지음,
길벗이지톡,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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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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