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사람도 함께 분노했던 일제 만행

항일유적답사기 (24) - 경신참변

등록 2003.05.25 09:00수정 2003.05.2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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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적지 일대 산하
청산리 전적지 일대 산하박도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압록강 두만강 연안과 중국 동삼성,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단이 활발한 항일 운동을 벌이게 되자, 이를 저지하고 토벌하고자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 전투경찰을 남북 만주 각지에 소속한 영사관에 대거 투입시켜서 남의 나라 주권까지도 무시한 채, 우리 독립군과 항일단체 간부들을 검거 색출하여 무차별 사살했다.


또한 일제는 중국 관헌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그들과 함께 ‘중일 합동 수색’이란 이름으로 우리 독립군에게 무차별 탄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행히 중국 관헌 간부 중에는 우리 독립군을 동정하거나 지지하는 인물도 상당수 있었기에 일제의 간교한 토벌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이에 일제는 자기네 군경을 직접 간도에 투입하여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발본색원하려는 대규모 토벌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독립군에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제의 만주 침략 교두보로 삼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노렸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뒤, 마침내 1920년 8월 ‘間島地方 不逞鮮人 剿討計劃’(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여 제19사단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병력을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다.

하지만 간도 출병에 따른 국제적 비난과 그들의 불법성을 은폐할 적당한 구실과 명분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그 해 10월 이른바 ‘훈춘(琿春)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훈춘사건은 일제가 사전에 치밀하게 공작한 작전이었다. 일제는 장강호(長江好)라는 중국 마적 두목을 매수하여 무기를 빌려준 뒤, 그들에게 1920년 10월 2일 새벽에 훈춘성을 기습 공격케 했다.

400여 명의 마적단은 중국군 70명과 조선족 7명을 살해하고 일본 영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 부녀자 9명도 살해했다. 이를 빌미로 삼아 일제는 대기 상태에 있던 토벌대 병력을 사건 당일 만주 지역에 곧장 투입했다.


중국 당국과는 사전 교섭이나 연락도 없었다. 이들 일본군의 작전 주목적은 우리 독립군을 완전히 뿌리뽑는 데 있었다.

이는 그들의 작전훈령에서 “조선 밖으로부터 무력 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 : 독립군을 말함)에 대하여는 이를 섬멸시켜서 타격을 가한다.”라고 명시한 대목이 입증하고 있다(김정주 편 <間島出兵史 上> 조선통치사료 4~5쪽).

이러한 일제의 작전을 알아차린 우리 독립군단은 중국 측과 타협이 되어 일제와 정면 충돌을 피하고자 새로운 근거지를 찾기 위해 나섰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백두산 밀림지대였다. 이곳은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 국내 진공작전을 펼 수 있는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아울러, 험준한 산세에다 삼림이 울창한 천연 요새지로 독립군이 은폐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독립전사들의 해방구였던 백두산, 일제시대 이 일대 밀영은 파르티잔들의 은거지였다.
독립전사들의 해방구였던 백두산, 일제시대 이 일대 밀영은 파르티잔들의 은거지였다.박도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은 독립군이 미처 백두산 밀영(密營)으로 장정을 시작하기 전 청산리 어랑촌 일대에서 10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그때마다 참패했다.

일본군은 독립군 초멸(剿滅)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독립군 활동 기반이었던 조선족사회에 잔혹한 탄압을 가하는, 이른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고한 민간인 학살과 조선족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벌였다.

1920년 10월부터 시작한 일제의 만행은 12월말까지 3개월간 집중적으로 저질러졌고, 그 후에도 잔류부대가 남아서 이듬해 5월말까지 이어졌다.

경신 참변으로 한인의 피해는 엄청났다. 임시정부의 간도 파견원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1920년 10월, 11월 두 달간의 피해만 해도 인명 피살 3600여 명, 체포 150여 명, 불에 태워진 집 3,500여 동, 학교 59개교, 교회 19개, 곡물 5만9000여 석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당시 룡정촌 부근 장암동 마을 참상을 목격한 미국인 한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을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다.

1920년 10월 말,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대 대장 오오까가 인솔한 77명이 장암동 조선족 전 주민을 교회당에 모았다. 그 중 40대 이상 남자 33명을 묶어서 교회당 안에 꿇어앉혔다. 그러고는 타작도 하지 않은 조 짚단을 교회당 안에 채워 놓고 석유를 뿌리고는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곧 불길에 싸였고, 일본군은 불길에 못 이겨 뛰쳐나오는 주민을 군도로 모두 찔러 죽였다. 가족들은 넋을 잃고 울부짖다가 그들이 돌아간 뒤 숯덩이가 되다시피 한 시체를 찾아 겨우 염을 하여 장사지냈다.

그날이 지난 지 대엿새 후, 일본군이 자기들의 만행 증거를 없애고자 다시 마을에 왔다. 그들은 유족들을 모아놓고 무덤을 파서 시체를 한 곳으로 모으게 했다.

그들은 시체 위에다 조 짚단을 쌓아놓고 석유를 부어 불을 지르고는 시체를 뒤적이며 재가 되도록 태웠다. 이렇게 이중으로 학살당한 유족들은 그들이 물러간 다음, 시체를 가릴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33인 합장 무덤을 만들었다. 일제는 저들의 죄악상을 숨기기 위해 별별 짓을 다했다.

하지만 당시 참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당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가 이 사실을 알았다. 장 기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 룡정까지 가서 취재하다가 실종되어 아직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고즈넉한 청산리 마을
고즈넉한 청산리 마을박도
그때의 경신참변 탓인지 청산리 항일전적지 표지목이 있는 언저리에는 집 한 채 찾아볼 수 없는 적막 강산이었다. 우리 일행은 여정이 바빠서 더 이상 백운평 전적지를 보고자 계곡을 오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대신하여 나는 거기서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부착하여 청산리 전적지 일대를 여러 장 담았다. 아름다운 녹색의 산하였다. 누가 이곳을 지난날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로 알리오?

나는 백운평 일대의 산과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셔터를 마구 눌렸다. 급한 마음에 망원렌즈를 달면서 카메라에 무리가 갔는지, 청산리 전적지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후 카메라 반사경이 위로 붙은 채 내려오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카메라는 나만 소지하고 있는데 고장이 나다니. 머리가 어디에 받친 충격이었다.

우선 그때까지 찍은 필름만이라도 살릴 양으로 되감기를 하여 뽑았다. 다음 여정은 백두산이 아닌가? 백두산 천지에서 마음껏 셔터를 누르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백두산 등정 직전에 카메라가 고장이 나다니 이 무슨 뜻밖의 재앙인가?

그것도 산중에서 일어난 일이니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내가 낙담하면서 우거지상이 되자 한 기사가 자기 카메라를 꺼내 주었다. 소형 자동 카메라였다. 손에 익지 않은 카메라였으나 비상용으로는 쓸만했다.

하지만 손에 익은 내 수동 카메라에야 견줄 수 있으랴. 나는 그제야 전문 카메라맨들이 두세 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까닭을 알았다.

백두산 등정을 앞둔 내 정성이 부족했나 보다. 매사에 무리하지 말고 준비를 철저히 하며 하늘에 기도해야 뜻이 이루어지나 보다. 백두산으로 달리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내 정성이 부족함을 깊이 뉘우치면서 ‘근신’을 여러 번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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