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적지 일대 산하박도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압록강 두만강 연안과 중국 동삼성,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단이 활발한 항일 운동을 벌이게 되자, 이를 저지하고 토벌하고자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 전투경찰을 남북 만주 각지에 소속한 영사관에 대거 투입시켜서 남의 나라 주권까지도 무시한 채, 우리 독립군과 항일단체 간부들을 검거 색출하여 무차별 사살했다.
또한 일제는 중국 관헌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그들과 함께 ‘중일 합동 수색’이란 이름으로 우리 독립군에게 무차별 탄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행히 중국 관헌 간부 중에는 우리 독립군을 동정하거나 지지하는 인물도 상당수 있었기에 일제의 간교한 토벌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이에 일제는 자기네 군경을 직접 간도에 투입하여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발본색원하려는 대규모 토벌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독립군에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제의 만주 침략 교두보로 삼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노렸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뒤, 마침내 1920년 8월 ‘間島地方 不逞鮮人 剿討計劃’(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여 제19사단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병력을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다.
하지만 간도 출병에 따른 국제적 비난과 그들의 불법성을 은폐할 적당한 구실과 명분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그 해 10월 이른바 ‘훈춘(琿春)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훈춘사건은 일제가 사전에 치밀하게 공작한 작전이었다. 일제는 장강호(長江好)라는 중국 마적 두목을 매수하여 무기를 빌려준 뒤, 그들에게 1920년 10월 2일 새벽에 훈춘성을 기습 공격케 했다.
400여 명의 마적단은 중국군 70명과 조선족 7명을 살해하고 일본 영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 부녀자 9명도 살해했다. 이를 빌미로 삼아 일제는 대기 상태에 있던 토벌대 병력을 사건 당일 만주 지역에 곧장 투입했다.
중국 당국과는 사전 교섭이나 연락도 없었다. 이들 일본군의 작전 주목적은 우리 독립군을 완전히 뿌리뽑는 데 있었다.
이는 그들의 작전훈령에서 “조선 밖으로부터 무력 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 : 독립군을 말함)에 대하여는 이를 섬멸시켜서 타격을 가한다.”라고 명시한 대목이 입증하고 있다(김정주 편 <間島出兵史 上> 조선통치사료 4~5쪽).
이러한 일제의 작전을 알아차린 우리 독립군단은 중국 측과 타협이 되어 일제와 정면 충돌을 피하고자 새로운 근거지를 찾기 위해 나섰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백두산 밀림지대였다. 이곳은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 국내 진공작전을 펼 수 있는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아울러, 험준한 산세에다 삼림이 울창한 천연 요새지로 독립군이 은폐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