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블러'다운 음반

Blur의 [Think Tank]

등록 2003.05.30 11:56수정 2003.05.30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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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lur [Think Tank]

Blur [Think Tank]

블러는 줄곧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의 밴드였다. 물론 일부는 기타리스트인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항변하겠지만, 블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콕슨의 기타 사운드가 아닌 알반의 명쾌한 멜로디 라인이었고, 콕슨의 실험적인 지향보다는 데이먼 알반의 영민한 팝적 감각이 부각되어 왔다.


“그렇다면 파격적인 로파이 인디록 음반인 5집 [Blur]와 전위적인 크라우트록 / 일렉트로니카 음반인 6집 [13]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파격적이고 뭐가 전위적인가. 분명 [Blur]와 [13]이 예전 블러와 다른 사운드를 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5집 [Blur]는 밴드의 자기부정 성격이 강한, ‘의도적 일탈’에 가까운 음반이었다고, 그리고 6집 [13]은 데이먼 알반 개인의 시련이 묻어나는 결과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지 기타가 넘실대는 "Song2"에서도 특출한 선율 감각은 여전히 빛을 발했고(블러 역사상 가장 세계적으로 히트한 노래였다), 첨단으로 무장한 음반 내에서 홀로 구식 어법을 택한 "Tender"와 상큼한 "Coffee & TV"는 두말할 나위 없는 알반의 자식들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13]과 같은 음반이 포스트록 밴드가 대중적 어법을 취한 결과물이 아닌, 대중적 팝 밴드가 실험적인 제스처를 선보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팝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험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일 뿐, 그 이상의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음반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제작 과정에서 그레이엄 콕슨과 데이먼 알반의 대립이 있었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타 사운드의 확대 / 축소를 두고 빚어진 논란일 뿐, 팝 밴드로서 블러의 성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이러나 저러나 블러는 블러다. (혹자는 전작 [13]을 일컬어 “가장 블러다운 음반”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2003년 신작 [Think Tank]는 [13]보다도 더 지극히 블러다운 음반이다. 음반을 들어보면, 전작에서 시도했던 여러가지 새로운 요소들이 보다 안정감 있게, 정돈된 형태로 나타남을 감지할 수 있다. 또 한 음반 내에서 도저히 서로 조화될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소스들이 무리없이 조화되는 광경은 신기할 따름이다.

"Crazy Beat"의 전자음과 결합한 펑크 사운드,조 스트러머(Joe Strummer) 풍의 "Gene By Gene",월드비트(정확히 말하면 중동 음악)의 어프로치가 충만한 첫 싱글 "Out of Time"과 "Caravan"을 보라.


"Out of Time"의 에스닉한 오케스트레이션,"Crazy Beat"의 미치광이 비트. 이런 것들이 한 곡 내에서, 그리고 음반 내에서 어떻게 조화가 가능했을까. 또한 멜로디를 팽개친 뒤 재즈에서 빌려온 즉흥 연주를 받아들인 "On the Way to the Club"이나, 프라이멀 스크림이 빌보드 싱글 차트를 목표로 만든 것 같은 "Brothers And Sisters"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해답은 탄탄한 보컬 멜로디, 다시 말해 블러 특유의 ‘팝 음악을 만드는’ 감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에는 촉매, 매개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법이다. [Think Tank] 뿐만 아니라 블러의 모든 음악작업에서 그 역할은 보컬 파트가 도맡아 왔고, 이번에도 도맡고 있다.

가령 "Out of Time"을 보자. 중동의 이국적인 풍광과 현악 연주, 이것이 팝-록 음악과 함부러 결합했다가는 ‘썩어빠진 월드뮤직 착취’라는 비난을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연스레 얹히는 알반의 나직한 보컬, 기승전결 없이 시종 담담한 선율은 두 요소의 결합을 자연스런 것으로 만든다.

"On the Way to the Club"을 제외한 대부분의 곡들이 그렇다. 알반의 보컬 파트가 중심을 잡고, 이를 기점으로 여타의 음악적 소스들이 자리를 잡는다. 그 결과 [Think Tank]는 플레이밍 립스(Flaming Lips)가 그렇듯이, 듣기 좋은 선율과 실험적인 사운드가 보기좋게 결합한 음반이 되었다.

그렇다. [Think Tank]는 [Parklife]에 비견할 만한 멋진 팝 음반이면서, 동시에 [13]의 실험을 구체화시키고 정립한 예술적 완성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은 팝 음반이기도, 동시에 팝 음반이 아니기도 하다.

필자가 블러를 거듭 대단하게 여기게 되는 이유는, 여러 차례 밴드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간다는 점 때문이다. 블러는 오아시스에게 참패한 [blur] 때는 기막힌 음악적 변신으로, 데이먼 알반의 개인적 시련과 팀 내 의견충돌이 겹친 [13] 때는 윌리엄 오빗이라는 조력자를 통해 번번히 위기를 탈출해 왔다.

이번 [Think Tank] 역시도 넘버 투라는 콕슨의 탈퇴로 절대절명의 위기가 빚어질 뻔 했으나,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밴드 역사상 (어쩌면) 가장 훌륭한 결과물이며, 놀랍도록 잘 만들어진 팝 음반이 아닌가.

비록 [Think Tank]가 그레이엄 콕슨 팬들에게는 불만스럽고 저주스런 작품일 수 있을지 모르나, 대다수 블러 옹호자들과 팝 음악 팬들에게는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이다. 이러나 저러나 블러는 블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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