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향한 동정심은 깊어만 가고...

[민심 르포] '대북송금 특검'과 '나라종금 수사'를 보는 목포

등록 2003.06.03 12:44수정 2003.06.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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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에 정박중인 어선들. 목포와 DJ를 잇고 있는 운명의 밧줄은 현재 진행형이다.
목포항에 정박중인 어선들. 목포와 DJ를 잇고 있는 운명의 밧줄은 현재 진행형이다.오마이뉴스 이주빈

영화비평가 로저 에버트의 표현을 빗대자면, 목포는 DJ라는 '책에 꽂힌 책갈피와 같다. 어떤 위치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책의 줄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1960년대 이후 목포는 DJ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함께 했다.

DJ의 고난은 목포의 수난이었고, DJ의 성취는 목포의 환희였다. 따라서 DJ를 뺀 목포의 역사는 조합되지 않은 도형퍼즐과 같다. 한 도시의 운명이 이렇듯 철저히 한 정치인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하는 사례가 어디에 또 있을까.

<오마이뉴스>는 대북송금 특검과 나라종금사건 수사에 대한 민심을 엿보기 위해 6월 1일 목포를 찾았다. 대북 송금 특검은 DJ의 치적이랄 수 있는 남북교류 사업과 관련된 수사다.

나라종금 사건엔 DJ의 큰아들인 김홍일 의원이 연루 혐의를 받고 있다. DJ와 함께 운명을 함께 해온 목포시민들의 가감없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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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정책은 DJ나 노무현이나 같은 계통이라고 생각해서 찍었는데…"

그러나 시민들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아꼈다. "IMF때보다 살기가 더 힘든 것 같어라"하며 애써 화제(話題)를 바꾸기도 했다. 그러다가 DJ 관련 얘기가 나오면 간간이 한마디씩 던졌다. 거침없이 속내를 털어놓는 목포 사람들 특유의 기질은 아니었다.

휴일인데도 갓바위 공원은 한산했다. 남농 기념관 앞에서 트럭 노점상을 하고 있는 나아무개(58세)씨는 "관광객이 2/3나 줄었다"며 "민심 취재할라믄 이따가 저녁나절에 시장통에나 가보시요"한다.


나씨는 "정치 얘기는 무슨, 하이고…"하더니 "김대중 대통령이 짠하제라. 무슨 비리를 저지른 것도 아닌디. (노 대통령이) 젊으니까 일단 어뜨께(어떻게) 한가 지켜봐야지라"며 얼른 입을 다물어 버린다.

해양박물관 앞 '단오 부채 그리기' 행사장에서 만난 나철주(31세)씨는 근래의 정국을 지켜보면서 "괴리감을 느낀다"고 짧게 언급한다. 나씨는 "(대북 송금 특검을 보며) 대북 정책은 DJ나 노무현이나 같은 계통이라고 생각해서 찍었는데…"라고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도 "(노 대통령 임기가) 이제 석 달 지났으니 지켜봐야 한다"고 기대를 접지 않았다.


해양박물관 계단에서 만난 채아무개(38세)씨는 "DJ가 전라도 출신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특검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목소릴 높였다. 채씨는 "남북이 무기 덜 사고 서로 잘사는 것이 나쁜 일이냐"고 되물었다. "느닷없는 특검으로 나라만 시끄러워졌다"는 그는 "DJ만 짠하게(매우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됐다"며 말을 끝냈다.

목포는 '대북 송금 특검'을 통해 김대중과 노무현의 간극을 느끼고 있다.
목포는 '대북 송금 특검'을 통해 김대중과 노무현의 간극을 느끼고 있다.연합뉴스

"DJ에 대한 동정심이 만만찮게 높아가고 있다"

옛 일본영사관 건너편에서 화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훈(54세)씨는 "호남 쪽에서는 노 대통령에 대해서 서운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주변 민심을 전한다. 이씨는 "대북 송금은 국가정책적인 일이었는데 이렇게까지 하느냐"며 "DJ에 대한 동정심이 만만찮게 높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씨는 "김홍일 의원까지 사법처리 되면 김 전 대통령의 세 아들이 모두 처벌을 받는 꼴"이라며 "김 의원은 정치적으로야 끝나겠지만 '안됐다'는 동정심은 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신을 목포시청 하위직 공무원이라고 밝힌 김아무개씨는 "전라도에서 노 대통령을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이럴 수 있나"며 "기분 나쁘고 서운하다"고 내뱉는다. 김씨는 "가난하게 사는 내 동포에게 돈 몇 푼 준 것도 잘못이냐"고 따진 뒤 "그게 잘못이라면 금강산으로 여행가는 사람들도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힐난했다.

아울러 김씨는 "DJ는 물론이고 세 아들까지 모두 줄줄이 까니까 '참 불행하고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며 "만약에 민주당이 노무현당과 동교동계당으로 갈라서면 목포 사람들은 아마 동교동계당을 선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회사원 이정진(36세)씨는 "(대북 송금 특검의) 칼끝이 결국 DJ한테 가는 것 아니냐"며 "해도 너무 한다"고 노무현 정부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한다. 이씨는 "개인비리도 아닌 남북간문제를 가지고 특검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DJ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분석했다.

"삼형제를 다 감옥에 집어넣어서야…"

나라종금 사건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김홍일 의원. 그에 대한 동정론도 만만찮다.
나라종금 사건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김홍일 의원. 그에 대한 동정론도 만만찮다.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나라종금 사건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김홍일 의원 문제에 대해서도 "삼형제를 다 감옥에 집어넣어서야 되겠냐"며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바뀌었다면 모를까 노무현 정부가 호남을 이런 식으로 배제시켜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사십대 남자는 "사람들이 말을 잘 안 할라고 하지라?"고 기자에게 반문한다. "기냥(그냥) 답답하고 해서 뉴스도 안 본다"는 그는 "영감(DJ)을 저렇게 몰아 붙잉께 지지했던 우리들도 꼭 죄인같은 심정"이란다.

그는 "억울하고 분해도 말할 데도 없고, 말해봤자 '전라도 느그들은 원래 DJ편인께'하고 또 몰아 붙여버리니 기운이 다 빠진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영감(DJ)이 하도 짠해서 생각하믄 눈물만 나고, '노무현이도 역시 경상도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하니 찍은 것이 후회스럽기까지 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정치적 의사표현에 유달리 적극적이었던 목포 사람들. 지금 그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침묵에 동정과 서운함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호 <목포신문> 기자는 이 침묵의 원인을 "상실감 속에 커져 가는 원죄의식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수십 년 동안 한을 품고 살다가 DJ가 대통령 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런 '대통령 김대중'이 했던 일들이 지금 수사대상이 됐다. 대북 송금 특검으로 DJ의 측근들이 구속되고 소환되고, 나라종금 사건으로 아들 김홍일 의원이 조사 받는다. (두 사건의 수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DJ는 물론 김홍일 의원까지 한풀이의 상징으로 여기고 살아온 목포 사람들에게 무슨 낙이 있겠나. 여태까지 자신들이 행해온 정치적 선택의 비참한 결말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고 정치적 지향을 상실해가고 있다."

굳게 다문 목포 사람들의 입이 열리는 날은 목포가 새로운 정치적 지향을 설정한 날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 목포는, DJ라는 '책에 꽂힌 책갈피'와 같은 지위를 벗어나 목포만의 새로운 줄거리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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