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꿈꾸는 일탈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등록 2003.06.04 19:18수정 2003.06.05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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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문학과 지성사/1999) 라는 제목부터 의문을 유발하면서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 남자는 어떻게 끼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되었는가? 에 대한 의문을 풀어 가자.

이제 엘리베이터는 우리에게 계단을 대신하는 편리성으로 하나의 일상적 공간이 되었다. 비록 일상적 공간이지만 그 곳에서 위기에 처한, 즉 끼게 된 한 남자의 존재와 함께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독특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불륜, 우연한 사고, 살인 사건 등 일상 세계를 그저 바라보기만하는 리얼리즘의 시선을 거부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일상을 변형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루한 일상에서 꿈꾸는 짜릿한 일탈의 경험을 하게 된다.


살다보면 이상한 날이라는 것을 아침부터 감지하게 되고, 마침 우연히 면도기가 부러진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발견하게 되고 그 남자를 구해주지 못한 채 연속적인 불운을 겪다 드디어 자신도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상황은 교묘한 문체와 수법으로 실제 상황이 되어버린다. 불운한 사고는 각 사건 간의 철저히 계산된 인과관계에 의해 더욱 긴밀해지고 타당한 연속성을 가진다. 그 불운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흥미를 더해간다.

한편 작가 스스로 "서정적인 문체는 웬만하면 쓰지 않겠다" 라고 말했듯 문체는 간결하고 속도감이 뛰어나다. 이는 현대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빠른 심장박동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며, 엘리베이터의 빠른 속도와도 연관된다.

그리하여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흔히 ‘영화는 2차원의 세계이고 소설은 독자의 상상력의 세계가 더해진 3차원의 세계’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것에 해당되지 않는다. 우연성을 뛰어 넘은 완벽한 연속적 불운과 독자가 따라갈 수 없는 스피드로 독자의 상상력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법한 상황을 제시하여 독자를 주인공이 처한 불운에 발을 묶어 놓고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아, 그래서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독자의 상상력 차단은 소설 끝 부분에서도 이어져 독자의 뒷통수를 친다. 엘리베이터에 낀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을 주인공은 계속 끝까지 이야기하며, 구해주려 했다. 그래서 당연히 그 남자는 구해졌을 거라는 독자의 기대를 없애 버린다. 그 낀 남자가 그냥 사라졌듯이 말이다.

주인공은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같이 수록된 단편들의 주인공들 또한 극히 평범하다. <사진관 살인 사건>의 불륜을 저질렀던 아내와 위선적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형사, <고압선>의 한 여자를 사랑하여 투명인간이 되어 가는 은행원, <바람이 분다>의 시디불법 복제와 컴퓨터 게임에 빠져 사는 남자.

이런 주인공들은 김영하의 전작에 나타난 전형적인 자기 애착의 나르시시스트들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호출기, 휴대폰, 엘리베이터 등 문명의 이기라는 표상을 이용하는 인물들은 타자와의 소통에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나르시시스트들이다. 휴대폰을 빌려 주지도 않고 주인공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젖고 무시해 버리는 주위 인물들이나, 엘리베이터에 둘이 갇혀서도 대꾸하지 않고 혼자만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미스 정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수염을 반만 깎고, 사고로 엉망이 된 몰골로 인해 치한으로 몰리고, 자기 회사에서까지 경비원에게 끌려나가게 되는 상황에서 <거울에 대한 명상>의 죽기 전까지 이미지를 실체나 본질보다 중요시했던 나르시시스트 남자가 떠오르게 된다. 그 작품에서 비판했던 현대사회의 이미지 중심주의가 다시금 여기서 환기되는 것이다.

황당하고 드라마틱한 하루의 일과에는 현대인의 인생에 대한 비애감, 소외감, 고독이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에 억세게 재수 없는 하루지만 한번쯤 꿈꾸는 일탈의 발직한 상상력의 결과인 하루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에 새로움을 주는 고마운 하루일 수 있다. 그러나 끼인 남자가 사라졌듯이 그것은 날마다 계속되지 않으며, 그 하루의 끝에서 주인공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인터폰을 하게 되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 왔다. 그러고는 담담히 끼인 남자를 궁금해 할 뿐이다.

고장났던 엘리베이터가 정상으로 작동되듯이 특별한 하루가 끝나고 예전의 똑같은 일상의 시작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우려하는 작가의 급진적 허무주의가 작용한다. 삶의 비애나 고독이 다시 계속 될 것이라고, 일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담배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중략) 두 번째 소설집을 묶는 지금 좀 더 독해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고 작가 후기에 언급하고 있지만 이 허무주의는 독자에게 충분히 독할 따름이다. 그의 계속되는 독한 허무주의의 담배 연기에 우리는 일상과의 호흡이 어려워지고 몽롱해질 위험이 있다.

김영하의 소설은 우선 재미가 있다. 또한 다양하고 독특한 이야기 소재를 말 그대로 지능적인 서사적 테크닉으로 허구성을 뛰어 넘는 소설이다. 그러면서 나르시시즘, 신파, 악마적 탐미주의, 에로티시즘, 급진적 허무주의, 물화된 성과 욕망 등의 김영하 소설의 정의를 구축하였다.

독자의 상상력을 속도감 있는 문체와 완벽한 허구성으로 따돌린다. 거기다가 때때로 읽는 이의 기대 심리까지도 져 버린다. 한편, 일상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것보다 완벽하고 매력적인 일탈의 예를 제시해 주기까지 한다. 그의 이런 면에서 우리는 김영하의 담배 같은 소설에 중독되었다. 또 ‘김영하’라는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엘리베이터에 낀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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