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함, 그 2%가 부족할 때

이만교의 <그녀, 번지점프 하러 가다>를 읽고

등록 2003.06.05 23:28수정 2003.06.0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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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자신 있어,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 "

이는 이만교의 또 다른 장편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0년, 민음사)에 나온 대목이다. 맞선 본 남자(준영)에게 자신은 결혼 후 바람필 것이며, 바람피고도 안 걸릴 자신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연희).


2000년,『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이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대중에게까지 주목받기 시작한 이만교는 2001년「그녀, 번지점프 하러 가다」를 발표했다. 두 소설 모두 여자주인공을 앞세워 결혼의 조건과 사랑, 일탈에 대한 욕구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독설적으로 뿜어내고 있다.

이만교의 단편「그녀, 번지점프 하러 가다」(2001년, 현대문학)의 ‘그녀’ 역시 ‘연희’처럼 일상에서의 일탈과 짜릿함을 꿈꾼다. 이만교는 그녀의 이러한 이야기를 마치 소극장 무대에서 상연되는 하나의 연극처럼 조용히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비윤리적이거나 너무나 권태로운 이야기를 일상이라는 아기자기한 무대 위에 경쾌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린 여기서 그의 극에 연출방식으로 쓰인 ‘대사’와 ‘무대장치’들에 주목한다.

‘그녀’의 독백

‘그녀’의 독백으로 처리되는 세심하면서도 솔직한 내면심리묘사는 그의 소설이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독백에 사용되는 어휘와 표현은 매우 솔직 대담하다. 그녀의 마지막 독백 ‘이건 강간당한 것보다 더 지독해!’처럼 주인공들의 내면심리는 한 치(끝?)의 꾸밈이나 숨김없이 드러내진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내면묘사를 통해 세상을 꼬집고, 우리 자신의 삶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대사로 처리되는 그의 짧고 경쾌한 문장들의 리듬감은 ‘그녀’가 처한 일상적 삶의 우중충함을 오히려 산뜻하게 보여주는 데에도 성공했다.

번지점프, 그 짜릿한 2%


그녀가 시도한 번지점프는 일상에서의 탈출인 동시에 성적 외도, 일탈을 의미한다. 번지점프가 일상에서의 일차적인 탈출을 의미한다면 이에 따른 이차적 시도가 있다. 바로 번지점프장에서 만난 대학생 ‘석이’의 엽서에 짜릿함을 느끼고, 야릇한 상상까지 해가며 피임준비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인데, 이는 분명 성적 외도의 시도라는 점에서 규범에서 일탈한 비윤리적 행위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일탈행위는 그 시도조차 매우 소박하고, 한편으로는 어린 아이 같은 귀여움까지 느끼게 한다. 혹시 사고가 나 죽었을 때를 대비해 몸에 맞지도 않는 처녀시절의 속옷(그녀는 이를 항상‘내복’이라 표현하는데, 여기서 그녀의 전형적인 아줌마스런 순박함까지 엿볼 수 있다)을 꽉 끼게 입은 채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나, 번지점프를 다녀온 후 남편에게 은근슬쩍 번지점프 얘기를 흘리며(물론 남편은 전혀 눈치를 못 챌뿐더러 관심조차 없다)희열을 느끼는 그녀의 모습은 참 순박하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소박한 일탈은 시도에만 머무른 채 결국 실패하고 만다. 아마도 이 실패의 이유가 바로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한 메시지의 중요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밖의 소도구들


‘모카향 커피’나 ‘밤기차로 떠나는 겨울바다의 회상’ 등의 소품들은 지나친 냉소주의로 빠지기 쉬운 이 극의 분위기를 아담하고 따뜻하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의 것과 너무도 닮아있는 그녀의 살림살이들과 공간구성은 그녀의 솔직한 심리묘사와 함께 우리를 더욱 그 극 안으로 빨려들게 하는 중요한 요인 역할을 한다.

또한 자궁귀소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욕조’나 초라한 현실적 자아에 비유되는‘살찐 소파’(황지우의 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살찐 모습의 소파는 안위, 정체 , 무력한 자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와 이러한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화장대 손거울’등의 소품들 역시 극의 연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겨울바다’나 ‘살찐 소파’, ‘거울’등의 소도구들은 이미 기존의 여러 시, 소설 작품에서 동일한 이미지로 쓰여 온 소재인 만큼 그 신선함은 떨어지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아기자기한 소도구들로 꾸며진 그의 극은 ‘평범한 진실’을 담은 경쾌한 희극, 즉 평론가 이남호가 말한 대로 한편의 ‘블랙코미디’로 상연되고 있다. 이 ‘블랙코미디’의 소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그가 제시한 ‘평범한 진실’이다.

“우린 모두 2% 부족하다!”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항상 새로운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의 느낌을 갈구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 몸의 호르몬에 의한 작용이라 한다. 끊임없이 다른 이성(異性)과 일탈대상을 동경하게 하는 호르몬이 우리 몸에서 분비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에서 벗어난 ‘탈출’과 ‘비밀’이라는 완벽한 두 조건의 조합은 우리의 호르몬 분비를 더욱 부추긴다.

우린 누구나 이러한 일상과 기존 규범에서 벗어난 짜릿한 2%를 꿈꾼다. 그리고 그 짜릿함을 맛보는 순간, 그 것이 더 이상 2%가 아닌 98%로 도치(倒置)되어 느껴지게 된다. 기존 결혼제도라는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성적 짜릿함을 위해, 결혼 후에도 또 다른 애인(준영)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의 주인공(연희)이나 장롱 밑에 처박힌 남편의 양말 한 짝을 찾고 있는 스스로가 측은해져 혼자 번지점프를 하러가는 ‘그녀’….

이들은 물론 정도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자신의 기존상황이라는 98%의 현실에서 벗어나 일탈된 세계라는 짜릿한 그 2%를 찾아 떠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탈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들은 2%의 달콤한 스릴에 영원히 도취되어 머물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는 그 2%의 생활 속에서도 슬슬 일상(그녀의 본 결혼생활)과 같은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2% 그 세상 속에도 역시 숨어있던 98%의 존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한편,「그녀, 번지점프 하러 가다」의 ‘그녀’역시 ‘번지점프‘와 ‘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도해본 일탈에 실패했다. 그녀들이 도취되었던 그 2%의 마법같은 호르몬 작용에서 풀려나는 순간 일탈이라는 것은 단지, 자신만의 비밀이라는 짜릿함에서 온 만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이만교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녀들을 모두 다시 98%의 그녀들의 일상으로 돌려보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만교가 굳이 이러한 실패한 일탈소재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한번쯤은 우리의 기존 테두리 안에서 탈출하고픈 그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이며, 그 속에 삶의 경쾌한 진실이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이제껏 만들어 놓은 일상이라는 안락한 우리들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나 2% 부족하다. 상상만해도 짜릿해지는 그 느낌, 호르몬이 탐하는 그 2%를 갈구해보는 것, 그 것이 바로 문득문득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작은 여유가 아닐까? 차마 모든 걸 떨쳐버린 완벽한 탈출에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그 힘! 그 것이 바로 다시 우리를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싶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 지음,
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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