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법원만 아는 '반국가 · 이적 단체'

[차병직 칼럼] 국가와 사회의 '적'을 규정하는 잣대는

등록 2003.06.11 08:55수정 2003.06.1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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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9일)에 발행된 모든 신문에 지난 주 서울지방법원 형사21부가 선고한 판결 기사가 실렸다.(그리고 주요 일간지들은 그 재판이 8일에 선고됐다고 보도했다. 물론 법원은 일요일에 쉰다. 실제 선고는 지난 주중에 했다. 언론의 이런 관행에 젖은 오보나,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법원의 관행에 젖은 사상 판결은, 우리에게 혼란을 준다는 의미에선 오십보 백보다.)

법원은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을 결성한 의대 교수와 전 보건소장에게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진보의련은 이적 단체라는 것이다.

보도된 기사만 읽으면 언뜻 이상한 기분이 든다. 출범한 지 겨우 백 일을 넘긴 새 정부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당혹감과, 오히려 백 일을 넘기면서 안간힘으로 반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이 정부가 조성하려는 새 분위기에 부합한다는 놀라움이, 서로 마구잡이로 섞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성격이 진보적이라 하더라도 보건 의료 단체를 이적 단체로 규정해 버리는 판결 하나는, 우리에게 군사 독재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재판에 고려됐을 그 세세한 사정을 모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결과만은 이 시대의 분위기와는 도저히 맞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단순히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것만은 아니다. 흥분하고 비판하고 우려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국가보안법의 문제로 돌아가지만, 아무리 반복돼도 또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법원은 진보적 의료인들의 운동 단체였던 진보의련을 간단하게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역시 폭력적 행동이나 구체적 위험이 아니라 단순한 사상이다. 가슴과 머릿속과 그들만이 보관하는 유인물에 담고 표현한 양심과 사상을 시비의 대상으로 삼아 이적 단체라는 국가 기관 발행의 공식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은 정말 지나치다.

우리 사회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지식인과 행동가들이 어디 한둘인가.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거나 아예 주장하고 나서는 연구자나 양심가들의 존재가 어제오늘에 한정된 모습인가. 이 지구상 어디에 순수한 자본주의가 있으며, 어디에 완전한 사회주의가 있는가. 우리 헌법에 엄연히 규정된 사회주의적 요소는 어떻게 이해하자는 말인가.

뿐만 아니다. 보건 의료 운동을 사회 변혁 운동의 한 영역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진보의련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권 옹호를 위한 보건 운동 단체가 아니라 국가 변란을 선전 선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적 단체라고 했다. 어느 사회건 내부의 모순이 없는 곳은 없다. 그 모순에 관심을 가지고 제거하거나 완화해 보자는 것이 사회 운동이다. 그러한 사회 운동이 모든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민주적 기본질서다. 단순한 논리라도 법원은 이렇게 한 번 거꾸로 짚어 볼 생각은 못했던가.

판결 이유에서 재판부 스스로 인정하듯, 진보의련은 이미 해산하여 2년 전부터 활동이 전혀 없는 단체다. 이런 과거의 그림자에 대고 이적 단체를 선언하고 징역형을 선고하는 법원의 사상은 무엇일까. 사회주의라는 관념적 용어와 국가보안법이라는 관습적 제도에 대한 콤플렉스 외에 달리 있을 게 없다.

그렇다고 법원이 강한 힘을 보여 정세와 여론의 분위기를 뒤집어 보려는 참여 정부의 의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여 선고했을 리도 만무하다. 유효 기간이 지나가는 최루탄 재고 처리도 걱정되고 하여 사용가능성을 언급한 경찰청장의 태도와 맞물리면 그럴듯한 시국적 장식이 될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 법원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할 정도로 현명하지도 못한 만큼 약삭빠르지도 못하다. 그 수준에서 안심할 수 있어 다행인지 모른다.

이번 판결을 두고 이런저런 사설을 늘어 놓는 것은, 결코 선고 결과가 우리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판결의 내용이 역사와 시대의 변화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사회에서, 우리 시민들의 민주적 · 법치적 · 정치적 · 사상적 · 문화적 · 세계적 · 시대적 감수성은 각자 따로 노는 기준과 척도에 어지럽다. 법원의 판결은 거기에 혼란을 더하기만 한다.

이 변화무쌍한 시절에, 그리고 과감한 사고의 전환과 상상력 없이는 맞서기 힘든 미래를 앞에 두고, 과연 무엇을 잣대로 국가와 사회의 ‘적’을 단정할 수 있겠는가. 반국가단체나 이적단체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사상으로는 구체화하기 어렵다. 오직 그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오직 법원의 판결밖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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