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밀, 하얀 코털

아! 나도 이젠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등록 2003.06.11 10:31수정 2003.06.11 12:3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미국 서부영화 어디선가 하얀 코털이란 이름의 등장인물을 본 것 같다. 백인장군 중 하얀 콧수염을 가진 잔인한 장군에 맞서 싸우는 인디언들이 그 악질적인 장군을 부르는 이름이다.


아내가 말한다.

“코에 딱지가 붙어 있어요”

거울을 본다. 정말 오랜만에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코딱지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

나는 약간 짜증스런 말투로 물어본다.


“잘 살펴봐요!, 분명히 하얀게 묻어 있다니까?”

다시 거울을 들여다본다. 아! 정말 하얀 것이 내 코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코딱지가 아니다. 그 하얀 것의 정체는 코털이었다. 나는 코속 깊숙한 곳에 있어서 잘 만져지지도 않는 그 하얀 코털을 뽑아내고는 아내 앞에 돌아섰다.


“이젠 없지?”

나는 그게 코털이었다고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얀 콧털! 그후 자꾸만 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웃음이 지어진다. 친구들은 벌써 몇 해 전부터 머리털이 듬성듬성 희어지기도 하고, 벌써 반백이 다된 친구도 있다. 새치머리 하나도 없는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은근히 뽐을 내며 아직도 생생한 청춘을 자랑하곤 했었다.
그런데 하얀 코털이라니!

사실 나에겐 비밀이 하나있다. 몇 년 전부터 턱수염 중 몇 개가 흰색으로 색이 바뀐 것이다. 휴가 때 며칠 출근하지 않고 놀면서 일부러 면도를 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가족을 태우고 서울을 벗어나 ‘나도 이젠 자연인이다’는 느낌을 만끽해 보고 싶어서였다.

매일아침 면도를 해도 저녁이면 금세 까칠까칠하게 자라서 다소 지저분하게 보이는 게 신경이 쓰여 제법 오래 정성들여 깎던 수염을 며칠째 깎지 않으니, 근질근질한 느낌이 드는 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휴가가 며칠 남아 있지만 그냥 면도를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해 버렸다.

아직 청춘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자랑하듯이, 제법 촘촘하게 나있는 턱수염 사이로 노란색깔의 털이 몇개 발견된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제법 길게 자란 턱수염을 뽑아서 확인해 보니, 뿌리부터 노란 것이 영락없는 노란수염이 아닌가!

나는 그날 당장 턱수염을 다시 짧게 깎아 버렸다. 수염을 짧게 깎은 턱에선 노란색의 자취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곤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오늘 나는 하얀 코털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제법 몇 개의 코털이 코 안에서 마음대로 이리저리 뻗어있는 모습을!

하긴, 서서히 낡아가는 내 몸의 흔적은 그것만은 아니다. 사실 얼마 전부터 나는 얼굴에 주름이 늘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얼굴엔 두 가지 주름이 있다. 눈가에 하나, 그리고 눈 사이 이마에 하나.

눈 사이 미간에 난 주름은 얼굴을 찡그릴 때 생겨나는 것이다. 난 어지간한 일에는 잘 찡그리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주름은 나의 그런 생각이 틀린 것이란 걸 증명해 보이고 있다. 거울을 보며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 봐도 미간에 생긴 주름은 찡그릴 때가 아니면 생기지가 않는 것이다.

눈 옆으로 눈 꼬리를 따라서 뻗어나가는 또 하나의 주름은 웃을 때 생기는 것이다. 나는 눈웃음을 짓는 버릇이 있다. 다른 웃음을 지어보려고 하여도 웃을 때마다 눈웃음이 지어지고, 그때마다 눈꼬리에 주름이 접히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렇다. 내 얼굴의 주름은 기쁨과 슬픔의 흔적이다. 내가 내 나이만큼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기뻐하고 슬퍼한 흔적이 그대로 내 얼굴에 남겨진 것이다. 삶에 늘 기쁨만 있을 순 없듯이 주름도 눈 옆에만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또 그만큼의 주름이 미간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노란 턱수염을 발견하고, 하얀 코털을 발견하게 되듯이 언젠가는 백발이 내 머리를 덮을 것이다. 처음 그런 것들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조금씩 마음이 심란하기도 하지만 난 결국 그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겐 하나의 소망이 있다. 그것은 좀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좀 더 많은 인생의 연륜이 내 얼굴위에 흔적을 남길 때 내 머리위에 하얀 백발이 가을벌판의 억새들처럼 물결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집안은 대대로 소문난 대머리 집안이기 때문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