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57

다물연공관 (4)

등록 2003.06.12 13:20수정 2003.06.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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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핫! 이제 마지막 관문이외다. 그 동안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이제 두 분 가운데 먼저 관문을 돌파하시는 분이 차기 무천의방의 방주가 되실 것이오니 심혈을 기울여 주십시오."
"……!"


소화타 장일정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노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관문이 시작된 이후 지금껏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 대신 가끔 헛기침만 하던 육십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본적이 없기에 성품이 어떤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으나 희디흰 학창의는 그가 고고한 학(鶴)같은 기품을 지닌 듯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이십 년 동안 무천의방의 부방주 자리에 있던 속명신수(續命神手) 담천우(曇天雨)라는 인물이었다.

사부이자 부친이며, 현재 무천의방 방주인 천강성의(天降聖醫) 담화진(曇華鎭)만 없었다면 일찌감치 방주가 되었을 인물이다.


현재 그의 의술은 적어도 무천의방 안에서는 부친을 제외하고는 가장 뛰어났다고 모두들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속명신수는 부친의 이번 처사가 심히 불만족스러웠다.


이제 얼마 후면 정확히 일백 세가 될 부친은 이제 너무 늙어 의술을 펼칠 수 없다면서 스스로 방주직을 내놓겠다고 하였다.

침술의 대가였지만 눈이 침침한 이상 제 아무리 천강성의라 할지라도 더 이상 시침(施鍼)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처한 것이다.

이에 무천의방의 모든 의원들은 부방주인 담천우가 차기 방주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배경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무엇보다도 의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담천우에게 특혜를 부여해도 별 말이 없을 법했다. 그런데 담화진은 아들로 하여금 다른 의원들과 똑같이 무천십관을 돌파하라 하였다. 물론 아무런 배려도 특혜도 없다하였다.

그렇기에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것이다. 평상시 자신의 호령 한 마디에도 벌벌 떨던 하위직급 의원들과 같이 의술을 다퉈야한다는 것이 심히 못 마땅하였던 것이다.

사실 청강성의 담화진이 아들로 하여금 관문을 돌파하여 차기 방주가 되라고 한 것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자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난 이십 년간 부방주였기 때문에 그냥 차기 방주가 된다면 나중에라도 말이 나올 수 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으며, 세상에는 늘 만사를 삐딱하게 보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관문을 돌파하여 방주가 된다면 억겁 년이 흘러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치 못할 것이다.

현재 무천의방의 방주라는 자리는 가히 천하제일의라는 칭호와 같은 것이다. 의원으로서는 가장 영광스런 자리일 것이다.

담화진은 아들인 담천우에게 자신과 버금갈 의술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세상 어느 의원도 그와 의술을 겨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당하게 관문을 돌파하여 이 대에 걸쳐 무천의방의 방주가 배출되는 담씨 가문을 빛내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차기 방주가 되기 위한 열 관문 가운데 아홉을 돌파하는 동안 백팔 명에 달하던 후보 가운데 이제 남은 사람은 장일정과 담천우 이렇게 단 둘만이 남은 상태이다.

시험관의 말대로 이제 누가 먼저 관문을 통과하느냐가 차기 무천의방 방주를 결정하는 일이 된 것이다.

장일정은 긴장된 눈빛으로 담천우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현재 장내에는 현 방주인 청강성의 담화진과 시험관, 그리고 도전자인 담천우와 장일정 뿐만 아니라 천하 각지에서 구름처럼 운집한 의원들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누가 천하제일의가 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현장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건만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아주 긴장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소문이란 전해지면서 조금씩 보태지기도 하고 감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때에는 원래의 말과 전혀 다른 뜻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장일정이 상해에서 들었던 말도 그랬다.

상해에서는 장일정이 무천의방의 차기 방주 후보로 확정되었다고 소문났으나 이는 부풀려진 헛소문에 불과하였다.

막상 무림천자성에 당도해 보니 무한의 저잣거리엔 온통 천하각지에서 몰려든 의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마침 무천의방의 의원을 선발하는 의과(醫科)가 치러질 시기였던 것이다.

장일정과 동행한 무천장주는 당연히 내원으로 안내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는 무림천자성의 인물이니 성안으로 들어가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나 장일정은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성문조차 넘지 못하도록 제지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소화타 장일정이 전직 어의(御醫)도 포기하였던 환자를 쾌차하게 하였다는 소문이 강호에 진동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천의방의 의원들에게 있어 그것은 확인 안된 소문일 뿐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곧 치러질 의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문으로 나왔던 무천의방 소속 말단 의원들도 그만한 솜씨는 있으니 큰소리칠 것 없다고 면박까지 주었다.

이에 상해 무천장주가 끼어 들었으나 얼굴만 붉히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무천의방의 일이니 일개 무천장주는 개입하지 말라는 면박을 당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무천의방의 의원들은 아무런 권력도 없다. 그저 환자의 병을 돌보는 의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천장주가 찍 소리도 못하고 물러난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천의방 소속 의원들은 무천장주로서는 감히 어쩌지 못할 수뇌부들과 그들의 식솔의 안위를 책임지는 책무를 맡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밉보이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에 공개적으로 무안을 당했지만 얼굴만 붉힌 채 물러난 것이다. 이에 무천의방 소속 의원이 되기 위하여 모여들었던 의생들은 눈빛을 빛냈다.

자신들도 무천의방 소속 의원이 되면 막강한 권세를 지닌 무천장주들에게 호통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한편 만인이 보는 앞에서 된통 면박을 당한 장일정은 불쾌하였지만 이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 동안 북의와 남의, 그리고 호옥접에게서 전수 받은 의술이 다른 의원들과 비교하였을 때 어느 정도인지 몹시 궁금하던 터였다. 따라서 제법 명성 깨나 지녔다는 의원들 모두가 도전한 의과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술이 다른 의원들 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만이 아니라 사부와 사숙 때문이었다.

일찍이 남의와 북의로 불리면서 만천하에 명성을 드날리던 그들의 진전을 고스란히 전수 받았으니 당연히 다른 의원들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쨌거나 무천의방의 의원이 되기 위하여 모여든 의원들의 수효는 자그마치 육천이나 되었다. 천하 각지에서 조금이라도 명성을 얻은 의원이란 의원은 모두 모인 셈이었다.

무천의방에서 실시한 의과에는 모두 다섯 관문이 있었는데 매 관문마다 수효가 팍팍 줄어들었다.

첫 관문에서 육천이었던 응시자가 삼천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두 번째 관문에서는 일천오백으로 줄었고, 이후엔 칠백으로 줄었다가 다시 삼백으로 줄어들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 관문을 통과하여 무천의방 소속 의원이 된 자는 겨우 셋뿐이었다.

육천 중 셋이니 이천 대 일이라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물론 장일정은 모든 관문을 통과하였다. 그런데 관문이 치러지는 동안 세인들의 시선은 온통 그에게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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