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위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데

<워킹홀리데이 - 홀로떠난 여행 5>

등록 2003.06.12 16:56수정 2003.06.1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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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다이어리
첫 번째 위기


호주에 온 지 1달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친구의 소개로 잠시 캠시에 있는 주택에 머물고 있었다. 캠시는 한국인이 정착한 첫번째 지역으로 아직도 한국인 상가가 눈에 많이 띄었다. 토요일 킹스크로스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을 마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으로 향했다.

캠시는 저소득층이 많고, 이주민이 특히 많아 우범지대로 통했다. 대신 집 값이 싼 편이라 시티 내에 머물 가격으로 독방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저녁이 되면 인적이 드물어 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무서웠다. 그래서 늦은 시간에는 주인 오빠가 마중을 나와주곤 했는데, 오늘따라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이고, 아직 6시가 넘지 않아 혼자 길을 걷고 있었다. 앞에서 젊은 외국계 청년이 다가왔다. 5달러를 들고 웃으며 내게 다가와 전화를 걸려고 하니 잔돈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난 다이어리를 꺼내고 동전을 꺼내려는 순간. 그 청년은 강도로 돌변했다. 내 다이어리를 뺏고, 나를 밀친 후 달아났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바라보며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help me!"라고 소리쳐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나중에 자가용 한 대가 내게 오더니, 좀 전에 있던 상황을 다 보았다고 한다. 그 분은 호주에 정착한 한인으로 노래방을 경영하고 있다고 하신다. 경찰에 신고하라면서 자기가 목격자가 되어 주겠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한 지 5분이 안 되어 경찰관이 와서 다친 곳은 없냐고 물어본 후 조심해서 다니라고 충고해주었다.


다이어리에는 일주일간의 아르바이트비와 밀린 집세가 들어 있었고, 한국에서 떠날 때 할머니가 주신 한국 돈…. 그리고 내 대학생활이 빼곡이 적힌 글들이 있었다. 주인 오빠는 집세를 깎아주고 밥값도 안 받으셨다. 그 후 걱정이 되시는지 역까지 늘 마중나와 주셨다. 아직도 고마운 주인 오빠에게 갑작스럽게 집을 떠나 실망감을 준 듯해 미안한 마음이다.

1999년 7월 캠시 잔디앞
1999년 7월 캠시 잔디앞공응경
그 후 난 혼자 길을 걸을 때면, 두려움을 느꼈고 행여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가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였다. 이런 공포감을 떨쳐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밥 먹을 돈도 없었지만, 걱정하실까봐 한국에 있는 집에 연락도 못하고 좌절해 있을 때 레스토랑에서 일주일치 아르바이트비를 미리 챙겨주었다. 이렇게 도와주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위로해주는 친구들을 있어 상처는 곧 아문 듯했다.

두 번째 위기

1999년
1999년공응경
그런데 나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다가왔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한 달 정도 남겨두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호주 전역을 돌아보려고 했는데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 주인오빠를 만나 렌트비를 주기로 하였는데, 주인오빠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은행 바로 옆에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햄버거를 하나 시키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앞에서 어떤 여자가 콜라를 내 앞에 쏟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옆으로 옮기고 가방을 의자 뒤에 걸었다. 청소원이 옆에 와서 마포질을 하며 부산했다.

이후 뒤를 돌아본 순간 가방은 사라진 것이 아닌가? 분명 나는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가방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황당했지만, 첫번째 캠시에서의 경험을 기억했다. 바로 패스트푸드점 직원을 불러 사정을 얘기하고 CCTV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매니저는 비협조적이였고, 청소원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후 몇 번을 가보았지만, 그 청소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은행에서부터 따라온 누군가와 패스트푸드점 직원의 협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1999년
1999년공응경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했는데, 경찰에선 자기네 구역이 아니라며 다른 곳에 가라고 한다. 그렇게 경찰서만 4군데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너무 아무렇지 않은 듯 응대하는 경찰의 태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범인이 이 근처에 있을텐데….

경찰관은 나에게 하루에 가방분실 사건이 이 구역만 10건이 넘는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나는 그럼 누구나 자신의 전 재산을 잃어 버리냐고 반문했다. 왜 그렇게 많은 돈을 갖고 있었냐며 그건 나의 잘못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 경찰관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섰다. 혹시 나의 영어가 미숙해서였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사건 시간부터 의심 가는 일들과 패스트푸드점의 CCTV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꿈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 문구에 패스트푸드점 CCTV를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경찰관은 패스트푸드점 CCTV를 확인해보겠다며, 뭔가를 발견하면 연락을 주겠지만, 내가 직접 CCTV를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이후 경찰서에서 가방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찾았다고 전화가 왔다.

갈기갈기 찢어진 내 영어사전과 책들을 바라보았다. 한순간에 계획된 모든 일들이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것에 허무감이 밀려왔다. 지금 같아선 패스트푸드점 측의 과실도 물어 소송이라도 해보았을 텐데, 혼자 떨어진 외국 땅에서 22살에 어수룩했던 나는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파트 주인 오빠는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돈을 갚으라며 계좌번호를 적어주었는데, 어쩌다 보니 쪽지는 사라지고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늘 베풀며 생활했던 인심 좋은 주인오빠, 지금 이 글을 읽는다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1999년 호주 바닷가
1999년 호주 바닷가공응경
내가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주었던 많은 친구들

피지친구 딘 샤민은 같이 경찰서를 돌아 다녀주고 불이익을 받았을 때 대신 앞장서 주곤 했다. UTS대학교 케어그룹 맴버들은 잘 곳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늘 기도해주었다. 그리고 밀린 방 값을 받지 않던 주인오빠….

자신의 어려움에 급급한 나머지 도와주는 친구들에게 아무런 표현도 못한 채 돌아온 것이 너무 후회스럽다. 살다보면 자신이 뜻하지 않은 길에 빠질 때도 있고 모든 것을 잃을 때도 있다. 다른 것은 잃더라도 친구들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절의 어려움을 이겨냈을 것이다.

더불어 살아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나는 지금 그때 나를 도와준 친구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젠 그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IMG6@도움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냥 떠나버린 나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늘 내 마음 속에 그들의 따뜻함이 살아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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