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편지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86>어머니 전상서

등록 2003.06.16 15:59수정 2003.06.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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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수돗가에서 나물을 다듬는, 살아 생전의 어머니(가운데)

수돗가에서 나물을 다듬는, 살아 생전의 어머니(가운데) ⓒ 이종찬

어머니! 올해도 어김없이 하이얀 개망초꽃이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모가 시퍼렇게 자라는 논둑에서도 개망초꽃이 바람에 하얗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다랑이논이 갈빗대처럼 매달려 있는 비음산 비탈진 곳에서도 개망초꽃이 오뉴월 햇살로 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12년 전 타고 가신 그 꽃상여처럼.


그렇습니다. 개망초꽃이 곳곳에 떼지어 피어나는 걸 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어머니 기일이 다가온 모양입니다. 개망초꽃을 바라보면 문득 앞산가새 다랑이밭에 까투리처럼 쪼그리고 앉은 어머니, 열무와 상치, 파를 솎아내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개망초꽃처럼 머리에 하얀 수건을 쓴 그 모습이.

어머니! 지난 해 가을, 어머니 곁으로 가신 아버지는 만나셨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들판에 나가 하리가 부서져라 그렇게 일을 하십니까. 그러다가 목이 마르면 집으로 돌아와 댓병에 든 소주를 한 대접씩 따라 드십니까. 어머니께서는 으레 그랬듯이 잘 익은 멸치젖갈을 아버지의 술안주로 내놓으십니까.

그 장독대 곁에 심어둔 봉숭아꽃과 분꽃은 잘 자라고 있습니까. 그 장독대 곁에 하르방처럼 누워있는 절구통 속에는 지금도 물만 가득 담겨 있습니까. 그 물 속에서는 지금도 모기의 유충들이 까맣게 꿈틀거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저희들이 쬐끔 부어놓은 석유방울에 모기의 유충들이 까맣게 가라앉았습니까.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흑백필름이 예쁘게 둘러쳐진 그 밀짚모자를 쓰고 계십니까.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점심 식사를 하신 뒤 감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그 마루에 누워 낮잠 한숨을 주무시고 들판에 나가십니까. 아니면 요즈음은 물꼬트기에 너무 바빠 낮잠조차 주무시지 못하십니까.

참! 아버지보다 몇 해 먼저 저승에 가신 그 아재.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용술이 아재는 무얼 하십니까. 용술이 아재는 지금도 하루가 멀다하고 놀러 오십니까. 그리고 장화가 벗기 싫어 마루에 걸터앉아 아버지와 술잔을 주고 받으십니까. 지금도 술잔이 몇 바퀴 돌고 나면 으레 6.25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십니까.


어머니! 마른 논바닥처럼 까맣게 갈라진 손과 발은 어떠하십니까. 아직도 그 손과 발에서는 땀이 잘 나지 않아 고생하십니까. 매일 저녁만 드시고 나면 쑤시는 팔 다리 때문에 "니 이리 와서 팔 다리 좀 밟아라. 야가 와 그래 힘이 없노? 더 세게 밟아라"고 하시던 그 팔 다리는 어떠하십니까.

이순신 장군보다 더 멋진 수염을 기른 외할아버지께서는 지금도 그 허연 수염을 멋지게 쓰다듬고 계십니까. 외할아버지께서는 틈만 나면 지금도 <능라도>란 제목이 붙은 그 누런 책을 읽고 계십니까. 그리고 끼니 때마다 외손주들 먹이기 위해 쌀밥 반 그릇과 고기 토막 몇 점을 남겨두십니까.


외할머니는 어떠하십니까. 외할머니께서는 지금도 외손주들 곪은 배를 채워주기 위해 어른 주먹보다 더 굵은 감자를 삶고 계십니까. 땀 찔찔 흘리며 찾아온 외손주들을 위해 그 향긋한 물외(오이)를 차디찬 우물물에 썰어넣고 계십니까. 아니면 소 눈망울 만큼 큼직한 그 눈깔사탕을 안주머니 깊숙히 숨겨두고 계십니까.

a 살아 생전의 어머니와 아버지

살아 생전의 어머니와 아버지 ⓒ 이종찬

어머니! 요즈음 저승살이는 어떠하십니까. 이승살이보다 더 살기 편하고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저승살이도 이승살이처럼 그렇게 팍팍하고 힘에 부치기만 합니까. 이제 내일이면 어머니의 12번 째 기일입니다. 내일 밤이면 우리 형제들은 모두 모여 어머니와 아버지께 제사를 올릴 것입니다.

이번 어머니 기일은 아버지께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신 뒤 처음 맞이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늘 한그릇이었던 어머니의 젯상에 고봉밥을 두 그릇 떠올릴 것입니다. 내일 밤, 부디 두 분께서 결혼하실 때처럼 좋은 예복을 곱게 차려 입으시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십시오.

오늘도 들판 곳곳에서는 하이얀 개망초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밤에 오실 때 혹시 길이 어두워 오시기가 힘들면 하이얀 개망초꽃을 달빛으로 삼아 그렇게 찾아오십시오. 오시다가 간혹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라도 헝클어지면 아버지께 하이얀 개망초꽃으로 머리핀을 삼아달라고 하십시오.

아아, 이제는 삼라만상이 되신 어머니 아버지. 티없이 맑은 하늘에 걸린 뭉게구름을 오래 바라보면 문득 어머니 아버지께서 손짓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바람이 불면 어머니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립니다. 비가 내리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 굵은 땀방울이 보입니다.

아, 뜰에 서 있는 나뭇가지가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뭇가지는 그렇게 늘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보이지 않는 그 흔들림으로,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그렇게 우리들 주변에 늘 살아 계십니다. 아아! 이제는 삼라만상이 되신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내일 밤에는 개망초꽃이 오늘보다 더 하얗게 피어날 것입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오시는 어머니께서 내딛는 발자국마다 개망초꽃이 반딧불이처럼 환하게 밝혀줄 것입니다. 그럼 내일 큰형님 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주들이랑 같이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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