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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어려웠던 시절에 비해 호사스런 생일상을 꼬박꼬박 받은 편이다. 그 시절을 함께 한 동창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일을 챙겨주시던 엄마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하긴 농번기에 들어서면 자기 손으로 아침밥을 지어 먹고 오던 친구들이 수두룩하던 때였으니, 생일상은 그 집안의 어른들이나 받는 특별한 잔치였을 것이다.
할머니를 합해 11명이었던 대가족의 생일을 챙기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했을 텐데 엄마는 식구들의 생일을 일일이 기억하셨다. 상차림의 메뉴에는 차별을 두었지만 딸들의 생일에도 떡은 잊지 않고 해주셨다.
생일날 밥상에는 미역국에서 진동하는 참기름 냄새와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과 함께 거친 모양새지만 맛은 유별났던, 엄마가 밤새 만든 쑥 개떡이나 인절미가 놓여졌다.
식구들이 많아서 자주 돌아오던 생일날 밥상은 그 어느 때보다 푸짐해서 좋았다.
평소에는 쌀보다 보리가 더 섞인 잡곡밥을 먹었는데 생일날은 할머니 아버지 남동생과 동격(?)인 흰 쌀밥을 고봉으로 차지했다.
그날의 주인공에게는 '특별대우'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가난이 배경처럼 깔려 있었던 어린 날은 이제 아련해졌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지혜롭게 생일에 의미를 부여해주셨던 엄마 덕분에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눈이 열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농사일과 동네일에 바쁜 아버지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바빴을 텐데도 장독대를 가득 채우고 사랑채 가는 길목에 꽃화분으로 집안을 꾸미셨다.
마당 앞 작은 텃밭에는 상치, 쪽파, 부추, 오이, 고추, 호박 등을 심어 찬거리를 해결했지만 텃밭을 삥 둘러싼 꽃길을 만들어 놓으실 정도로 감성적이고 정신적 여유가 넉넉하셨다.
하루 종일 농사일을 마치고 한밤중에 졸린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도 떡을 만들기 위해 절구에 불린 쌀을 쿵쿵 찧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내게 엄마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역할이어서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막연한 다짐을 하게 했다.
우리들의 잠까지 방해하면서 늦은 밤까지 노동의 고된 시간을 참아내던 엄마의 손 끝을 거친 재료들은 다음날 아침 밥상에 먹음직스런 특별 메뉴로 등장해 있었다.
그렇지만 따사로운 엄마의 특별 생일상은 오래 받지 못했다. 중학교 때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자취를 하게 된 이후로 당일 생일상은 받지 못했다. 토요일 오후에 배를 타고 고향에 가면 일요일 아침에 지나간 생일 미역국을 끓여주시는 것으로 대신해주셨다.
하지만 서서히 변해 가는 사춘기 딸의 입맛을 예측하지 못하고 쑥이 대부분인 개떡을 해주시거나 막걸리로 발효시킨 밀가루 빵을 한 소쿠리 만들어주셨다.
여고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러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맞는 생일 즈음에 아버진 무화과 잼과 떡을 수화물로 보내셨다. 서부역 뒤 켠에서 무거운 수화물을 언니와 낑낑대며 들고 오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정성스런 편지와 엄마에게서 받은 첫 편지는 그 어떤 선물보다 귀한 것이었기에 아직도 맘을 울렁이게 한다.
부모님 슬하에서 받았던 생일상은 이젠 내가 차려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부모님의 생신이 다가오면 가볍게 전화하고 온라인으로 용돈을 보내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내가 미워진다. 얼마 남지 않은 딸 아이 생일을 보낼 생각을 하다가 특별한 생일을 위해 늦은 밤까지 떡방아를 찧으면서 졸기도 하시던 엄마의 잔잔한 미소가, 끄덕이는 고개가 오래오래 가슴을 파고 든다.
조금 있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드려야겠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알뜰살뜰 챙겨주셨는지...
그러면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냐. 집에 있는 쌀인데 떡 만들면 되고 낮에는 일이 많았으니 잠자는 시간 줄여서 밤에 한 것뿐인데..."하신다.
늘 우문현답이 되고마는 문답은 며칠간 산처럼 쌓인 스트레스도 한방에 날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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